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잠언 26:23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 18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말씀의 주제로 작성한 설교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내 안에는 얼마나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을까?’ 하고 궁금하여졌다.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이었다. 필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으로 이에 대한 증거가 내 안에 우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 맞다. 전에는 ‘~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확연히 다른 나를 마주할 수 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달라진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나를 보곤 한다. 그리고 사는 데 치열한 오늘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그래서 이와 같은 말씀이 피상적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아주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아이가 성경공부를 와서 나는 먼저 이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었다. 금요일에 성경공부를 하니까 주일 날 설교 말씀이 먼저 이뤄진다. 넌 복이 있구나, 말해주었다. 오후께 외조카 아이가 왔다. 그러시려는가, 하고 마음을 주시더니 아이 스스로 주일 날 이곳으로 예배를 오겠다는 것과 혹시 글쓰기를 좀 할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의 대화였다. 남달리 하나님이 두시는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게 되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종교에 대해 철학에 대해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을 응원하였다. 왜냐하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탈북아이가 배탈이 나서 못 오겠다는 그 시간을 외조카가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글을 쓰되 말씀 묵상을 같이 하기를 권하였다. 하긴 서울 방화동에서 인천까지 예배를 왔으면 한다는 마음이 어찌 우리 임의로 얻은 것이겠나. 더더욱 나는 성령의 열매에 관심이 커졌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내 안의 열매인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애’를 ‘이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지? 하고 신기해할 정도로 내 안에 드는 사랑이 예전에 내 것이 아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생겨나고 마음 쓰이고, 이런 마음을 더욱 풍성히 부어주신다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결코 이는 내가 선을 행함으로 ‘그리해야겠다.’ 하는 수고와 노력의 마음이 아니다. 때로는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은 나도 내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희락, 곧 기쁨에 대해서도 며칠 전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느꼈지만 ‘알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는 있었다. 저들의 근심 걱정이 전에는 나에게도 크게 느껴지던 고통이었는데 이제는 그것과 상관없는 기쁨이 있다. 화평은 또 어떤가? 이런 평안을 위장한다고 될 일이던가? 하나님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씨를 뿌리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때론 내가 낯선 까닭도 그런 것이다.
한데 이 세 가지 열매는 교회에 혼자 있을 때는 확실히 구분이 된다. 내 안에 이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선명하다. 그런데 이게 세상에 드러날 때 돌연 희미해지거나, 언제 그랬지? 싶을 정도로 무뎌지는 것은 왜일까? 여전히 나는 세상에 살아야 하고, 가끔은 짜증나게 하는 현실과 전혀 이와 같은 열매와는 무관한 친구들과 마주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랑이 휘청거리고 희락과 화평도 작위적인 게 된다. 혼자 있을 때는 누릴 수 있는 열매가 밖으로 나올 때면 자주 흔들리는 데는 그만큼 나의 감출 수 없는 유약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의 다음 열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특기다. 이를 나에게 가져올 때, 진득하고 무던함으로 연마된다. 곧 즉흥적으로 무엇에 혹, 하지 않는 것. 욱, 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 곧 나를 조바심나게 하는 것들로부터 무뎌지게 하는 것이다. 나의 예민한 성격도 혹은 과민반응이나 금세 불쾌함을 느끼는 것에도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앞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보존하게 하신다. 혼자 있을 때야 몰랐던 나의 숨겨진 본성들로부터 열매를 보호하는 열매가 ‘오래 참음’이다. 옛 본성을 길목에서 막아준다. 조급함, 노파심, 참견과 잔소리로부터 말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으로 또는 친절함으로 드러난다. 물론 여기서 친절은 인위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그것이 아니다. 그때의 친절은 냉혹함을 감추고 있거나, 실제 친절했던 사람이 유독 잔인한 경우도 그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로 맺어지는 ‘자비’는 앞서 ‘오래 참음’을 먹고 자라고, 뒤에 따르는 ‘양선’을 도모함으로 굳건해진다. 양선은 착하고 순한 마음이다. 본래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결코 순하지 않다는 걸 장담한다. 불같이 화를 내고 때론 야비할 정도로 보복을 한다. 더 차갑게, 더 냉정하게.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튼실하게 자라가는 데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그 뒤를 따라 자라나기 때문이겠다. 하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충성’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한결같음이고 든든한 균형감이다. 다시 말해 꾸준함이다. 보면 꾸준함을 당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래서 저절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열매가 ‘온유’다.
오늘 잠언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잠 26:23).” 악한 마음은 자기 의, 자기 아집에 물린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늘 우선하는 마음이다. 곧 자기 신조가 성경의 권위보다 앞선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말씀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다. 그런 자의 입술이 온유하다는 것은 위선적이다. 저는 바리새인처럼 ‘진실하고 열심을 다하는 사람’일 수 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같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차단한다.
외조카가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의 원인이 그와 같지 않을까? 저는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다.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일명 가짜다. 그러니 만족함이 없다. 해도 해도 그 수고가 힘겹기만 하다. 이에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라고 말씀하셨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곧 그 지경이 넓어진다. 위축되고 주눅들 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유함이란 ‘맹목적으로’ 엄마의 품에서 안도하는 아이의 마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계산할 것도 없고 이해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다. ‘온유’는 성령께서 겸손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맨 끝에 ‘절제’를 두었다. 전에도 묵상할 때 그 의미가 선명하였던 것처럼, 절제가 없는 성령의 여덟 가지 열매는 독과일과 같다. ‘사랑’이 넘쳐 참견이 되고 집착이 된다. ‘희락’이 넘쳐 방종이 되고 헛된 즐거움만 탐닉한다. ‘화평’은 자칫 게으른 평화주의자를 만들거나 방관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오래 참음’은 무심한 사람이 되게 하여 책임회피자로 만들고, ‘자비’는 상품화되어 거짓 친절로 사람을 등칠 수 있다. ‘양선’은 넘치면 맹하거나 실실거리며 멍텅구리로 살아가게 한다.
‘충성’이 넘치면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청맹과니 같은 의리를 내뿜고, ‘온유’가 넘치면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든다. 물론 ‘절제’가 절제되지 않으면 혼자 산에 들어가 득도를 한다거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그것으로 더욱 튼실하게 자라게 한다. 절제는 결국 자기 통제다. ‘안돼!’ 하는 경고음을 울린다. 불쑥 화가 일어나다가도, 어떤 근심에 마음이 꿈틀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성령께서 ‘그만!’ 하고 내 손을 잡아 이끄시는 열매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하는 오늘 시편의 기도를 나는 내 안에 혼재돼 있는 어리석음을 두고 주께 고하게 된다. 그리고 아뢰기를,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 내 안에 좌정하여 주옵소서, 하고 말이다. 어느 것도 내가 인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모양은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살 수는 있겠으나,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고로 내 문제다. 아무도 모른다. 모르게 할 수 있다. 그런들! 정작 그 좁은 문을 홀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어쩔 것인가? 지금이라도 돌아서거나 아니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거나….
한참 그럴 수 있는 나이의 외조카와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아이와 심지어 글방에 와서 지독하게 수동적으로 글을 쓰는 아이들에게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어제 외조카에게 확신하기를,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게 하신 이가 또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아이의 마음에 두시는 생각을 내가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신다. 때론 낯설고 거칠어서 힘에 부친다 해도, 이 또한 다분히 주께서 의도하시는 선한 뜻임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0) | 2016.11.28 |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0) | 2016.11.27 |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0) | 2016.11.25 |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0) | 2016.11.24 |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0) | 2016.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