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전봉석 2016. 11. 27. 07:19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잠언 27:23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4-5

 

 

 

첫눈이 내리고 쌀쌀한 냉기가 가시지 않는 날이었다. 아내는 장모를 모시고 서울 동대문에 갔다. 구리에서 오는 아이는 면접이라 오지 않았다. 종일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설교원고를 살피거나, 광화문 광장을 보여주는 뉴스를 보았다. 대체 난 뭐 하고 있나, 싶다가도 이게 내게 맡기신 사명이라 생각하였다. ‘양떼의 형편을 살피고 소떼에게 마음을 두는 것.’ 곧 주께서 일러 명령하신 그 일에 대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여 나는 주의 집에 사는 자로 복을 누린다. 혼자 있어 심심하다가도 그래서 누릴 수 있는 넉넉함이 값지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주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날의 풍성함에 대하여 어찌 말로 다 형용할까?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홀로 창밖을 쳐다보며 눈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일이 감사하였다. 세상은 어지러운데 주일 날 함께 나눌 말씀을 다시 보고 살필 수 있어, 재밌었다. ‘주께 힘을 얻고’ 나는 이 말이 가장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고로 주께 힘을 얻는 자이다. 이에 ‘복이 있나이다.’

 

창가에 기대서서 유리에 붙여둔 ‘기도제목’들을 살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비록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묵지근해서 서성거리는 몸짓이었다 해도, 그러는 동안 그러므로 주의 이름 앞에 ‘양떼를 살피고 소떼를 마음에 두는 일’은 내가 할 일이라 생각되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농작물을 거두며 그 일을 천직으로 삼고, 노동자는 두꺼운 신을 신고 기름때 낀 손을 쉬지 않고, 아이엄마는 맡기신 유아를 돌보며 그의 하루를 온통 아이에게 전념하고, 교수는 가르치는 일에, 학생은 배우는 일에, 주방장은 주방에서, 운전자는 핸들을 잡고 묵묵히 그 맡기신 일을 준행하는 삶. 이는 숭고함이며 경이로운 사명이다. 이에 맡기신 바 주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일이 복되다.

 

아내는 돌아와서 하루 종일 혼자서 힘들었겠다, 하지만 그게 내 일인 것을. 내가 하루 종일 요한일서 4장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자신은 24시간 시(詩)만 생각한다고 했던 시인 친구의 말보다 못하면 쓰겠나?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부르시는 본문만으로도 마주할 수 있는 감격이 너무나 컸다. 그 사랑의 값어치는 어찌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사람이 되어 죽어주시기까지 한 십자가의 결정이다.

 

이로써 값 주고 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알 때,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하는 찬송(85장)을 음미하며 누리는 영광이 크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믿는 도리의 사도’로 살아가는 일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 이는 결코 목사이니까 직업적으로도 그렇겠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모든 믿는 자의 공통된 열매인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의 특징은 자신이 ‘구별된 자’임을 알고, 그러므로 분별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그럼 무엇에 대한 분별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이 명징한 구별됨 앞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말씀이 말씀으로 들리는 데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 그 이상이다. 귀에 들리는 걸 어쩌나. 또한 듣는다는 것은 스민다는 것으로 햇살이 창에 듣는 것처럼 뚜렷하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곧 말씀이 내 안에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아는 일’이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이를 부정한다. 저들은 이미 세상에 있다. 이처럼 성경은 굳이 애써 어떤 주석과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의미는 선명하다. 설교원고로 작성한 내용이 초라해지는 이유다. 다시 쓰고 싶고 새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한데 그것은 또 신기하게도 새로운 계시로 열려 말씀으로 다가온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수백 번을 고쳐 쓴다 해도 그 의미는 더욱 더 확장될 것이다.

 

설교원고를 보고 성경에 표시하고 메모할 때 또한 새롭게 열린다.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이 재밌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 다시 신기해진다. 말씀은 순전한 계시다. 열어주시는 만큼 보이고 듣는다. 아, 이건 꼭 전하고 싶어! 하고 밑줄을 그었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는 격이다. 신기하지? 좀 황당한 논리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모든 성경 구절이 궁극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령 책을 읽으면서 이제 나는 성경구절을 자주 메모한다. 그리곤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았는데 전날에 읽었던 성경구절과 연관되는 데 놀라곤 한다. 의도적으로 그래야지, 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저절로? 나는 이 ‘저절로’라는 말을 별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닌데,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게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래 맞다. 저절로 열린다. 내가 그렇게 애쓰고 신중하여서 온갖 의미를 대입하여 고심할 때는 꿈쩍도 않던 문이 뭐랄까? 스르륵, 저절로 열리는 같은 C. S 루이스의 나니아의 세계 같다고나 할까? 일개 다를 바 없는 옷장일 뿐인데 그 안에 문이 있었다. 신비는 결코 마술이 아니다. 눈속임의 요술이 아니다. 경망스럽지 않다. 결코 인위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러고 있는 내가 나를 낯설어할 정도로 신비로울 뿐이다.

 

창틀에 기대 누구를 생각하며 주께 아뢰는 일도 내가 왜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어찌 설명이 안 된다. 문득, 이를 온유함이라 여겨도 되지 않을까? 주께 아룀으로 의지할 수 있는, 성경의 여러 인물을 두고 그리 표현하셨다. 주님은 본인을 그리 표현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모세도 그런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바울은 이와 같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온유란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양떼와 소떼를 주가 두신 오늘의 형평과 사정으로 국한지어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이는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내 앞에 놓은 사람과 일과 여러 여건이 모두 주의 것이 아닌 게 있을까? 우리 두 아이는 물론 새롭게 오는 외조카와 족히 7년 만에 보는 여자아이와의 예배를 기대하였다.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 아니고는 어찌 설명이 안 된다. 아내는 아이들이 좋아할 불고기와 야채와 과일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지만, 그런들….

 

기쁨과 확신의 행복을 누구에게 빼앗길 수 없다. 이를 이 말씀과 연관지어도 되지 않을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나는 예수를 본 적 없고, 실제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사랑하는도다. 이제는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이를 어찌 감출 수 있을까?

 

혹여 또 기대했던 것보다 못하고 아니 실의와 절망감이 몰려올지라도, 토요일 한 날은 충분하였다. 그것으로 기도하고 기대하며, 그것으로 말씀을 보고 설교원고를 살피면서… 더 넓고 크게 확장되어지는 계시의 세계를 노닐 수 있었다. 결국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법이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발소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돌보고 위하고 사랑하는 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때론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에도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 84:6).” 그러므로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 각기 또 나와 같은 사명을 부여받아 한 날의 삶으로 족한 줄 알며, 감사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이겠다. 충분히 외롭고 우울하고 답답한 토요일 오후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별게 아니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으로 다가오게 될 줄이야! 이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부어주심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어떠하든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