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잠언 29:26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11
온 마음을 다해 주를 경외하는 삶은 복되다. 종일토록 주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아래 있는 나로서는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하다. 이는 특별히 나를 구별되게 두어 오늘을 살게 하시는 데 따른 감사다. 보면 누구에게도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없다. 잘 지내는지,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늘 쫓기듯 사는 것에 안타까웠다.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사느라 드는 수고와 애씀이 죄로 인한 것이어서 그와 같은 고단함이 자랑할 건 아니었다.
가정예배로 요즘 같이 읽고 있는 열왕기서를 보면 참으로 덧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와 자신들의 수고함이 너무도 그 간극이 멀어서 말이다. 오늘 다윗의 기도에서처럼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의 삶이 가장 현명하였다. 사람됨의 제 일 목적이 주를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염두에 두고, 주권자를 위시하여 우리는 무얼 바라고 구하지만 ‘모든 일의 작정은 여호와의 것’이다. 이를 알 때 일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자랑하고 주께 의지할 수 있는 것보다 소중한 게 또 있을까?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의 가증스러움에 대하여, 오늘 우리 사회는 썩은 내가 풀풀 나는데도 괜찮다, 아니라 하며 자신이 눈과 코를 가린다. 이는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열어 보이시는, 우리 사람들의 됨됨이를 말해준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하시고 이로써 더욱 주의 은혜를 바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하는 다윗의 기도를 웅얼거리듯 따라한다. 모든 열왕은 나름 자신들의 신념과 아집으로 살아갔다. 옳다고 쥔 걸 붙들고 사는 것이다.
월요일 나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구분을 묵상하였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경의 이해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나의 믿음은 신념만으로 온전할 수 없다. 헌신과 노력은 희생으로 다가 아니고, 그 열심이 온전할 수 있는 데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계신 성령으로 인함이었다.
계속 본문으로 잡고 있는 요한일서에서 그 답을 얻었다. 첫째가 기름부음이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20).” 둘째는 나도 정의할 수 없는 기쁨이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4).” 이 기쁨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설명이 되지 않는 기쁨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곧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는 데는 어찌 해석이 안 된다.
왜 기쁨을 주실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렇구나! 그런 거였다. 종일 들어앉아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싶다가도 무료함으로 말씀을 음미하고 외로움으로 주를 바라며 몸의 통증으로 감사를 실감한다. 요즘은 자주 창가에 서서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한다. 드러누워 책을 읽다가 서성거리며 말씀의 뜻을 살핀다. 돌아가는 세상이 어떤 증거보다 확실하고 선명하다.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이 ‘주 안에서’의 것임을 확신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명령이면서 당부였다. 인위적으로 내가 마련한 어떤 수고에 의한 기쁨이 아니었다. 주 안에서,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3:3).” 결론은 성령이다. 그리스도 예수로의 자랑이다. 일심으로 주를 경외한다는 건,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이 충만한 기쁨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살아서 오감으로 충족되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그래서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2).” 이 놀라운 비밀을 요한은 한 마디로 축약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곧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런 말씀을 음미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서있는 일은 황홀하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니 해도 다 정해진 날이 있고, 아등바등 은폐와 거짓과 나름의 신조를 붙들고 산다 한들 조만간 주 앞에 서야할 것인데… 나는 무엇을 들고 설까? 말씀일까? 기도일까? 아니면 이 땅에서 행한 헌신과 노력일까? 그게 아닌 것이다. 내가 수고하여 이 기쁨을 누리려 했다거나 혹은 교회가 나서서 이 기쁨을 나누어주려고 한다는 건 모두 헛되다. 왜냐하면 세상은 온통 만들어진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쁨이 기쁨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비극적이다. 성경은 늘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윗이 어떠니, 바울이 어떠니 해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누릴 가치가 있는 기쁨의 관계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내가 보는 데가 아니라 주가 보시는 데에 있었다. 그 주님이 누구신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이와 같은 말씀을 니고데모에게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왜 성경은 상한 심령을 제사보다 귀히 여기신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이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곧 이 때라!
내 안에 두시는 허기와 불안과 결핍이 궁극적으로는 주를 바라고 구하는 데 필요한 것임을 알겠다. 그러하게 하시려고 오늘 특별히, 이와 같은 현실과 상황을 내게 두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술하였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왜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지.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신다.
주일 날 한참을 강조하게 하셨던 것, 나는 ‘사랑하는 자’였다.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에 대하여.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 그게 나였다. 나는 누구인가?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하는, 그 사랑으로의 대상이었다.
곧 나는 주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그렇구나. 그런 거였다.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날에 나의 하루는 여전하여서 감사하였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글방이 들어 있는 자리에, 세가 빠지고 다들 텅 빈 곳에서 종일 혼자 있으면서도 내가 누릴 수 있는 넉넉함은 충분하였다.
이 마음을 품으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성경이 내게 두시는 하루였다. 곧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여전히 들끓는 애태움과 답답함과 헛헛함의 뿌리를 걷어내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그러하기까지 나는 주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가치는 얼마만한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였다. 한데 무엇이 아쉽고 서러울까?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나 딸아이의 스물일곱 번째 미역국을 끓인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이처럼 내가 한 게 없음에도 나를 고이 간직하시는 주의 사랑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여전하여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내 안의 불안과 근심과 걱정에 대하여는 더는 감당할 수 없음으로 주만 바란다. 일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그러므로 그런 것까지도 주 앞에 내어두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였다.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바 되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전부 내주어 값을 치른 나이다. 곧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러므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4).” 이는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5).” 그러므로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10).” 결국 일심으로 내가 주를 경외함이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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