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언 30:12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시편 87:1-3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를 들었다. 분노보다 안쓰러움이 답답함보다 두려움이 누구 이야기로 들리기보다 내 이야기로 들렸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그것이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무섭다. 나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사 14:32).”
무엇을 붙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세상은 연거푸 묻는 것 같다. 나의 이야기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사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성경이라도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이를 내 이야기로 들려주시는 이가 계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감사함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었다.
나를 보고 또한 세상을 볼 때 절대 기쁨은 없다. 주님의 목적은 하나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12).” 오늘도 날 위해 기도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곧 율법의 요구가 되신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3-4).”
점심을 먹고 와 이와 같은 내용을 읽고 있다가 대통령의 담화를 들었다. 그러니 드는 생각은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이었다. 사람됨의 끝 간 데 없는 ‘죄의 뿌리’였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나는 무엇을 붙들 것인가? 답답함이 목을 조이는 것 같다가도 그런 가운데서 나를 속량하시는 주의 제일 목적이었다는 데 새삼 감격하였다. 그러므로 ‘이것-구속함’을 기뻐할 수 있는 게 특권이겠구나.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신 말씀에 주를 더욱 바란다. 어느 미친 교회는 현 시국을 찬송가 가사로 개사하여 예배 중에 부른다고 하지 않나(그걸 옳다고 주장하는 목사에 대해 두려움이 일었다), 강단에 태극기를 걸고 누구 초상화를 붙여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지 않나… 원, 세상이 미쳐 날뛰니까 교회마저 다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엄밀하게 태극기가 갖는 우리나라 고유의 미신적인 해석에 대하여는 말할 게 없다. 이럴 때 더 확연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이다. 말씀이 내 안에 두시는 평안이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만족함으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나아가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그러므로 사망을 이기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곧 주가 능히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큰 은혜 중에 있어왔던가? 정말이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귀신을 숭배하고 속속들이 우상화된 문화 가운데서 무분별하게 혼용하여 섬겼던 게 얼마나 많은가?
저들 입으로 말하는 ‘혼의 정상의 비정상’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살았던가? 말끝마다 입에 붙은 주술적인 표현들은 말할 것도 없고(운이 나빠서, 재수 없게, 푸닥거릴 하든가… 등등), 아무렇지 않게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취하였던 행동들은 또 어떻고(문지방을 밟지 않는다든가, 기를 받는다거나, 동짓날 팥죽을 먹고 단옷날 청포로 머리를 감는 둥). 너무 일반화 되어버린 문화에 편승하고 살고 있다.
가령 동짓날 팥죽을 먹는 까닭은 역신을 쫓기 위해 긴긴 밤 동짓날 대문이나 벽에 팥죽을 뿌리고 그것을 먹었다. 단오에 청포로 머리를 감는 것도 점점 무더워지는 날씨에 재앙을 막기 위해, 단옷날 오시에 목욕을 하면 병을 없애 ‘단오물맞이’를 했단다. 뭐 이런 걸 굳이 따지는가 싶겠으나, 모르고 짓는 죄 또한 없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두려운 일이다. 전에 아이와 요가에 대해 이야기하다, 그 의미를 알고나 하나 싶어서 말했다가 ‘너무 예민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과 합장을 하여 천지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게 어찌 같은 의미일 수 있나.
유야무야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게 옳은 것이나, 무분별하게 저들의 주술적인 행위에 같이 동조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였다. 그게 어찌 같은 의미인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주의 명령에 따라 제단 앞에 드렸던 것과 훗날에 이르러 자식을 불 가운데 던지는 행위가 어찌 같겠으며, 모세가 놋뱀을 들었던 일과 훗날에 여전히 놋뱀 앞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어찌 하나라고 할 수 있겠나.
나는 요즘 두려운 게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의 하염없는 잡신숭배의 의미다. 이것이 참 자유의 삶을 위축시켜서는 안 되겠으나 덩달아 합장을 하고 저들 행위에 동의하며 그 제단에 머리를 조아리는 따위의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뭐…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어쩌고 하면서 무너져버린 우리 신앙의 경계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아니, 왜 자꾸 보수 교단 어쩌고 하는 이름이 거론되며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미쳐 날뛰는지 모르겠다. 교회가 큰일이고 목사가 문제다. 요한일서를 본문으로 다루면서 왜 저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라고 하는지,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는지 알겠다.
앞으로 더욱 난리와 난리 소문과 소문이 거듭될 것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정말이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때다. 기껏 잘 믿네 어쩌네 하다 한 방에 훅 간다. 정말 그럴듯한 게 너무 많다. 속속들이 다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온갖 비리와 추태와 거짓과 미신적인 것들을 눈앞에 두고, 과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리하여 애꿎은 목마름으로 엉뚱한 데 기웃거리지 말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어느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의 이야기다. 저는 가장 좋은 산중턱에 집을 짓고 무릉도원과 다를 바 없이 꾸며, 풍광과 어우러지는 그의 집은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이제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의 수십 개의 방과 넘쳐나는 욕실과 잘 다듬어진 정원에 수영장도 몇 개씩 갖춘 집을 꾸미고서 한 말 치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하긴 평생을 남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어느 희극 작가의 묘비명에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내용을 적어두었다니!
오늘 이 모든 일련의 사건과 상황은 기회다. 보고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서는 자의 복됨에 대하여 주가 하셔야 한다. 성령께서 하셔야 한다. 무엇이 적그리스도인지,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저를 따르는 무리와 이에 동조하여 좌고우면하는 많은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나는 비로소 나의 염려를 멈출 수 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자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비결은 그럼 무엇일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충성이란 묵묵함이다. 멈추지 않는 것으로 말씀이 그리 명하신 바를 무던히 행함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내 안의 반기와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만 이래야 하나, 싶은 억울함까지도 삼키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 그와 같은 의연함이 충성이었다.
마침 그때, 그와 같은 마음으로 어려울 때 읽은 내용이다. 첼로 명연주자이면서 세계적인 이탈리아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이야기다. 저는 다 좋은데, 그처럼 화를 잘 내고 늘 공연에 앞서 잦은 짜증으로 단원들을 들들 볶았다고 한다. 그날도 애꿎은 한 단원을 야단치다가 연습장을 뛰쳐나갔다. 이에 그 단원이 쫓아가 머리 숙여 사과하자,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결국은 나다. 문제는 나인 것이다.
대체 오늘을 사는 내게 가장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순서를 정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나라가 온통 난리굿이다. 마음은 어지럽고 생각은 쓸려간다. 덩달아 누굴 욕하고 종주먹을 휘두른다. 삿대질을 해대며 당장이라도 돌을 던질 판이다. 이때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리고 찬송가를 허밍으로 따라한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내 친구 되신 예수여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했네
나 주님을 늘 믿으며 그 손을 의지하고
내 몸과 맘을 바쳐서 끝까지 충성하리
내 진실하신 친구여 큰 은혜 내려주사
날 항상 보호하시고 내 방패 되옵소서
그 풍성한 참 사랑을 뉘 능히 끊을 쏘냐
날 구원하신 예수는 참 좋은 나의 친구
아멘.
-제임스 스몰, 새찬송가 90장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0) | 2016.12.02 |
---|---|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0) | 2016.12.01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0) | 2016.11.29 |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0) | 2016.11.28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0) | 2016.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