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잠 1:31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무섭도록 결과론적이다. 어찌 그런가 하면, 이미 우리가 사는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혜는 소리 높여 우리를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0-22).”
큰 아이가 열심을 다하던 곳에 최종합격을 하였다. 기쁜 마음과 함께 목사가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을 우려와 염려도 동시에 들었다. 잘 되면 잘 돼서 혹시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을까, 어려우면 어려워서 혹시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을까… 때론 내 안에 드는 마음이 이처럼 낯설도록 신기할 뿐이다. '교회 방'에 아이 소식을 올리고 서로 축하하였다. 그리곤 누구누구 왜 저 아이는 여전한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교회가 세 들어 있는 건물 사장이 오후께 와서 같이 차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목사에 대한 상처’가 있어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졌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변명과 환멸이 구원을 이뤄주지는 않는다. 아직 젊은 세 아이의 아빠는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것이다. 다 때가 있을 터, 그걸 지적하고 나무란다고 해서 돌이킬 건 아니었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에 다하여, 나는 이제 말씀으로 미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에게로의 중독이어야 한다. ‘새 술에 취한 자’로 사는 일이란 환경과 조건에 의한 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나 가능할 거였다. 아이가 어떠하든, 그럼에도 주 앞에 온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으로나 가능한 것이다. 요셉의 여정이 어찌 혼자만의 결연한 의지와 판단으로 가능했을까? 결국 환경과 여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하는 핑계는 꼭 그게 아니었어도 되는 게 된다.
모처럼 아이들의 간단한 축하 메시지와 나누는 대화에서 고질적인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엿보았다. 여전하다는 것, 참 그 아집의 속박은 무서운 일이다. 그래 맞다. 누구보다 내가 그처럼 고집스럽고 자아라고 하는 엄청난 우상을 숭배하며 살지 않았던가? 그러던 사람이 이처럼 주의 말씀으로 중독되길 소원하는 자리에 이른 것은 어찌 이성적인 설명으로 증명될 수 있는 일일까? 바울의 고백이 그래서 달콤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7-12).”
이제 보건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다. 이를 위해 다른 건 배설물처럼 버려져도 좋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난 의’다. 이를 이미 얻었다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이에 거리에서 지혜가 부른다. 광장에서 외친다. 숱한 환경과 여건에서 그와 상관없는 목소리가 들려진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결국 자기 선택을 먹고 자기 행위로 배부를 것이다. ‘다들 여전하군요?’ 하는 어느 아이의 힘없는 말투가 마음에 걸리는 것도 그 아이 역시 참 여전하구나, 하는 안타까움에서였다. 늘 사랑에 허기져하다 조금만 누가 관심을 더하면 파르르 좋아하다 금세 또 시들곤 하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꾀에 배부르다. 아이 카톡에 이어 뭐라 말을 해줘야 하는데, 한참을 멈칫거리다 그만두었다. 생각은 저 혼자 안타까움으로 흩어졌다. 저 아이를 보면 늘 사마리아 여인 같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도 타는 목마름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게. 내가 주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나 하였을까? 어찌 설명할 길 없는 안타까움에 대하여, 내 안에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이 부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렇구나.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염려와 근심까지도 사랑이었구나! 그러면서도 또한 설명할 길 없는 화평이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 이로써도 거듭난 사람은 항상 거듭난 사람을 기다린다.
미쳐 날 뛰는 세상에서 뭔가에 미쳐서 사는 게 인생이라면, 과연 무엇에 미쳐 살까?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그렇다면 이생의 것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다들 죽기 살기로 붙드는 명예와 재물도 아니며, 나름의 신념과 가치도 아닌 것이다. ‘어쨌든 성공하면 잘 사는 거 아닙니까?’ 하는 젊은 사장의 말에 뭐라 한들 그 귀에 들리겠나 싶었다. 그러므로 내게 두신 이 마음이 소중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88:13).” 주께 부르짖고 주만 의지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충분히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찌 모색한다고 해서 얻을 게 아니다. 이로써 성령의 교통하심을 누리며 사는 게 복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내 안에서 왕래하실 때 성령의 발소리가 때론 염려로 때론 근심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의 염려와 근심은 주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저 아이가 부디 주의 사랑에 거하기를 바라는….
다들 사무실이 텅텅 비어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저 안쪽에 들어 가뜩이나 조용한 글방이 더한층 고요함으로 더했다.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다루며 그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새삼 평온하였다. 중3 아이 셋이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 더욱이 수업을 오지 못했다. 어떻게 나를 바르게 알 수 있을까? 이는 드나드는 마음의 출처가 말해준다. 곧 관심의 정도가 말의 방향이 되고, 생각의 가치가 마음에 두는 이생의 무게다. 다시 또 후회와 눈물을 거듭하면서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데도 데려올 남편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의지한 것들의 허망함에 대하여! 기어이 살아서 살고 난 뒤에나 깨달을 것이라면.
아, 부디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이도 지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나니,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24-26).” 이를 두려움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귀하다. 결국은 자기 꾀에 배부를 것이다.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27-30).” 그러니 어느 때까지 젊은가 말이다. 어느 때까지 자신을 자신할 것인가?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2-3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안도할 수 있는 자의 평안에 대하여는 나는 이제 확신한다. 미치자, 스스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께만 향하자. 말씀만 의지하자. 그리스도로 중독되자.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하기를 갈망하자. 아이를 사랑하되 연민이 아니며, 한 영혼을 사랑하되 자의적인 나의 수고로움이 아니고, 교회를 이루어가되 내 의지가 아니라, 주신 삶을 성실히 살되 남과 견줄 게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므로 내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주의 은총이 아니었으면 나는 누구보다 고집되고 자기 의에 빠져 여전히 사랑을 구걸하며 살았을 것인데….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충분하였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시 88:10).” 이처럼 나를 살리시고 내 안에 내주임재하심으로 이와 같은 고백으로 아침을 채우게 하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와 영광을.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거 없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이것으로 됐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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