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전봉석 2016. 12. 7. 07:35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7:3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는 입을 열어보면 안다. 그 말이 되어지는 것이 관심사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라.’ 오늘 말씀은 단호하다. 다른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세상이 더 가까운 데 별 수 있나? 무엇이 마땅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자랑하게 돼 있다.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러니 말씀은 손에 뿐 아니라 마음에도 새길 것을 명령한다. 달갑지 않은 표현이지만 억지로라도 손에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본디 습관이란, 마음이 가는 데서 손이 머무는 법이다.

 

‘아는 게 힘이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 때 확신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혼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은 이유, 또 여전히 그에 대해 읽고 묵상하며 바라고 사모하는 데 소요되는 마음이 다행이다. 존 파이퍼의 <언어의 영웅들>과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왜 자꾸 손이 가는지 모르겠다.

 

딸아이 책꽂이에서 <신사임당>을 가져다읽겠다고 둔 것이 벌써 2주전이다. 서너 장을 넘기다 말고 더는 손이 안 간다. ‘손가락에 매고, 가슴에 새기는 일’은 어쩌면 내 의지가 아니고, 자의적이지 못하다. 가끔은 왜 늘 같은 말 같은데 이런 책을 또 읽으려하나 궁금해진다. 성경을 읽으면서 때론 참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사람의 죄악에 신물이 난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반응하시고 관여하신다. 그것에 나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은혜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저절로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것이 어찌 내 의지에 의한 것일까! 어림없다. 내가 아는 나는 절대 이러고 있을 위인이 아니다. 그렇게 답답하다가도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방장이 주방에서 새벽부터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하는 데 시간의 전부를 쏟는 것처럼, 운전사가 종일 핸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나, 농부가 밭을 갈고, 노동자가 기름때 묻는 기계를 조작하고… 목사가 말씀 붙들고 사는 게 당연하겠다.

 

뜬금없이 친구가 전화를 해서 무슨 사연을 들려주다, 넌 뭐하냐? 하고 물을 때에 ‘나야 늘 똑같지 뭐!’ 하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손가락에 매라.’ 이를 연마하고 익혀 ‘마음 판에 새기기’까지 열중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주 앞에 서는 날, 가장 적당하였다고 여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 가치의 경중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효용성에 있어서 과연 으뜸일 게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하는 것. 고로 내 안에 익숙하여서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넉넉함이겠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왜 바울이 이처럼 장담하는가? 왜 존 파이퍼 목사는 ‘영웅들’을 조명하고 있나? 대체 저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26:18).” 나의 수고와 애씀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바쁘게 돌아치는 삶에서 비껴나 있게 하심이 은혜였다.

 

친구들의 공통된 말, ‘팔자 좋다.’ 하는 그 비아냥거림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이를 ‘팔자’로 친다면 분명히 비성경적인 용어이나 그 뜻은 크게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이를 바울 사도의 해석으로 정리하자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오히려 넌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 친구의 구구한 사연이 안쓰럽고 답답하였다. 여전히 우물을 곁에 두고 삽질하는 저의 수고를 누가 말릴까!

 

안 믿는, 혹은 멀찍이 서서 따르는 자의 고단함에 대하여는 이제 별로 할 말이 없다. 참 사람 고약하여서 어쩜 그렇게 저마다 고집이 센지! 뭐라 한들 다 자기 등짐을 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이를 성경은 오만한 자로 지칭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사 28:22).” 바동거리는 만큼 결박이 더욱 단단히 조여들 뿐이다.

 

결국 저의 근심이란,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19).” 이래도 저래도 죽겠다는 소리뿐이다. 이는,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20).” 우리의 오만함이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애씀이었다. 이사야서를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며 오전을 보냈다. 참 재밌다.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위와 같은 부분에서는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에 그럼 어찌 되는 것일까?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32:17).” 다른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33:11-12).” 그러니 이를 손가락에 매는 일은 지혜의 부르심이었다. 일찍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11).”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33:15-16).” 이런 자로 살아내는 길은 바로 말씀을 손가락에 매고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사는 일이었다.

 

그렇게 불쑥, 친구나 누구와 통화를 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얼마나 큰 은혜 위에 거하는지를 확증할 수 있다. 저들의 수고와 애씀이 전혀 부럽지가 않은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덴 어렵지 않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첫째,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게 하고. 둘째,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고 터가 굳어져. 셋째,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넷째,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머물기를.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유리에 붙이며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자의 평안함은 주의 것이었다. 주께서 더하시는 나의 한 날의 삶이 족하였다. 다들 알겠는데, 저마다의 사연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일까?

 

때론 내가 아무 것도 못할 때, 아무 것도 아닐 때,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을 때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곧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고로 또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

 

그러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2-13).” 결국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 곧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

 

이 아침, 내 안에 드나드는 모든 생각과 염려와 고통을 말씀 앞에 내어두고,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