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전봉석 2016. 12. 8. 07:37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8:12-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1, 6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성경은 성경 읽기를 원하신다.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셨으면 이 말씀은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고,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 말씀은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곧 지혜라.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그 증거는 신중함으로 드러난다. 명철함이란 ‘총명하여 사리에 맞음’이고, 사리는 ‘이치와 도리’다. 곧 지혜의 주소다. 이를 찾는 길은 ‘지식과 근신’이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의 지식은 요한사도의 증언과 같이 전인적이다. 근신이란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이다.

 

삼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이는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막연하여 허상을 붙드는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2-13).” 지혜가 미워하는 것을 우리도 미워하는 일이 지혜를 구하는 일이다.

 

다시 또 그러므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성경은 우리를 부른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이와 같이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잠 8:1).” 한데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시 4:2).” 곧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

 

우리는 반드시 보리라.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2).” 곧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5).” 그럼에도 우린 말씀보다 세상을, 애굽을 의지하려 들기 때문에 괴롭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36:6).”

 

창가에 서서 성경을 읽다, 청문회를 보면 그 증거가 확연하였다. 돼먹잖은 우리의 죄악성은 숨고 가리고 부정하고 변명하며 핑계대고, 그게 다 너 때문이야! 한다. 소리 내어 또박또박 책을 읽고 그 소리를 들으며 교회 안을 서성거렸다. 느릿느릿 나의 시간은 조용하였다. 방학동안 아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글방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참 오랜만이라, 뭘 할까? 생각이 많아졌다. 오후께 중3 쌍둥이 아이들이 와서 글을 썼다. 공부는 하기 싫고 그저 미용사가 되겠다며 태평하였다. 같이 앉아 책을 읽었다. 아이들의 무력함은 병적이었다.

 

나의 하루는 단순하여 느리다. 압박과 수고가 따르는 세상에서 나의 시간은 별도로 흐르는 듯 하여 불안하다. 이대로 있어도 되나? 이게 정말 맞습니까? 하는.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모 기독교방송에서 어느 여배우의 간증을 들었다. 어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으론 설레고 한편으론 불편하였다. 말을 너무 잘해서 놀랐다. 매우 긍정적인 해석과 반응이 위태롭게 들렸다. 방송이라, 아무래도 ‘보여지는 나’를 너무 의식한 건 아닐까? 나는 고약하여서 늘 어줍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하는 말씀을 읽다 퍽, 하고 울음이 났다. 입을 삐쭉거리며 나의 고단함을 생각하였고, 어깨를 들썩이며 병중에 있는 아이를 아뢰었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13).” 마치 울고 싶던 아이에게 ‘괜찮아, 이리와’ 하고 토닥일 때의 속수무책이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44:2).” 내 안에 들리는 소리가 나를 향하신 것임을 확신하였다. 얼마나 어리석은 시대인지 모른다.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56:12).”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두렵다. 이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려준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65:24-25).”

 

그 주님은 나를 달래신다. 내가 여기 있다. 나인 줄 알 것이다.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52:6).” 창가에 서서 저 혼자 성경을 읽다 울먹거리는 내가 또한 말씀으로 위로를 얻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그래, 결심했어!’ 싶은 결연한 각오를 자랑할 수는 없지만, 그러므로 나의 빙충맞은 모습 그대로 주 앞에 설 뿐이었다.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주께 보답하는 삶이 되겠다, 하는 말로 나는 장담할 수 없어서 부끄러웠다.

 

그저 소극적인 사람이라 나는 다만 말씀만 붙들 뿐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와 같은 말씀 하나면 충분하였다. ‘내가, 뭘, 어떻게’가 아니라 주가 이루어 가시는 삶을 구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것도 은혜라. 청문회를 보다 사람들의 어쩔 수 없음에 혀를 차며 안쓰러웠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하물며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습은 또 어떠할까? 궁색하다. 모질고 악하여서 불쌍하다. 끝내 죄를 죄로 인정할 수 없는 자의 완강함은 극단적이었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욥 15:5).”

 

오늘 말씀은,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2-4).” 왜 그러시는 것일까? 아직 기회가 있어서다. 아직은 돌이켜 주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여서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 곁에 있던 강도처럼,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는 지혜의 외침이 들려야 한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러기를 싫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뭐라 하든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말씀이 귀하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3).” 더 무엇을 무서워하리요.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7).” 요지경으로 돌아치는 세상에서 주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자는 복되다.

 

성경 없이도 편히 살 수는 있겠지만 성경 없이는 편히 죽을 수 없다. 성경 없이도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겠으나 성경 없이는 고난을 이겨낼 힘이 없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그래,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게 인생이기는 하다. 누가 살아봤어야 말이지. 마찬가지로 누가 죽어봤어야 말이지. 어떤 아이의 항변에서처럼, 그럼 그때 가서 그러면 되지 벌써부터 그럴 거 있나요?

 

말씀이 숙성되어 내 안에 풍성하여지기까지는 단시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약속은 본래 금방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노아가 그 장구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갈 수 있었던 것도, 번번이 광야로 내쫓겨야 했던 다윗도, 저들의 믿음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나?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곧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11).” 말씀 붙들고 말씀과 씨름하면서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자의 이야기가 노아였고 아브라함이었고 다윗이었다. 성경의 어느 인물도 말씀 없이 승리하였던 적은 없다. 예수님도 말씀을 이루시었다.

 

말씀만으로 사는 것.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말씀은 나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할 능력이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