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잠언 10:9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편 97:12
관심에 따라 마음의 무게가 다르고 마음이 기운 곳으로 생각이 흐르게 돼 있으며 생각이 고인 곳에서 말과 행동이 넘실거리는 법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그리 크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의 세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비그리스도인에게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인다. 한데 서로가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갈 때면 그런 모습이 서로에게는 응원이 되고 격려가 된다. 그러므로 바른 길로 행하는 자의 걸음이 평안하다.
아이가 와서 이별의 정황을 늘어놓고 울 참이었다. 마침 설교 원고를 다시 읽으며 밑줄을 긋고 보충을 하고 있을 때였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며칠 전에 다녀간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생각보다 덤덤하였다. 새삼 내가 뭐라 해줄 말은 없고 토머스 화이트맨과 랜디 피더슨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이라는 책 제목을 메모해주고 읽어볼 것을 권하였다. 어려서부터 신앙이 있는 아이라 그런가, 이야기가 되고 서로 들려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편안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이와 같은 고백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의 공통점이다. 이를 아뢸 때 감히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이제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11:4).”
순종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 마음을 다하는 데 있다. 서로의 고통은 개별적이겠으나 그것으로 순종을 배우는 데는 동일하다. 예레미야서에만 ‘순종’이 무려 33회 거듭 강조되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순종이 빈 자리에는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이 없고,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악한 마음은 들어차게 돼 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7:24).” 그런 우리에게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도 순종을 배우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순종이란 자발적이기에 앞서 고집스럽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부모와 부딪치는 가장 큰 씨름은 고집을 꺾는 일이다. 고집은 자기 의견을 굳게 지키려는 타고난 의지다. 죄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없이 그릇 행하였다는 데 눈을 뜰 리 없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으로 고집도 없고, 고집이 없음으로 순종이 가장 쉬운 분이시다. 그럼에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고난에 내어주신 까닭은 이로써 이루어가는 순종의 과정을 우리들에게 알게 하려 하심이다.
대학 생활 대부분이 연애로 점철 되었고, 그러는 동안 모든 판단과 기준은 보류되었으며, 그러기까지 온통 ‘그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은 의지와 무관하게 방치되어 있던 것이다. 인생을 같이 할 사람과 그 추진을 위한 직업은 반드시 ‘같이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먼 길을 너무 오래 배회해야 할 수도 있다. 나름 이별이라는 고통이 지금은 너무 쓰고 힘들겠지만,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3주, 그 이상을 슬퍼야겠으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을 읽고 주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랐다.
참 좋아 보여요! 아이의 뜬금없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가 거부하지 않았다. 내 생에 어느 때보다 가장 좋은 시기를 살고 있다. 어떤 의미로 나에게 좋아 보인다고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엉덩이를 비틀면서 대화중에 일어나 허리를 주무르면서 전혀 좋을 리 없는데 좋은 난센스 같은 감정을 인정하였다. 세상이 주는 게 아닌, 나도 어떻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그런데 좋아 보인다는 말이 전혀 싫지 않은, 당연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나라는 대통령 탄핵을 코앞에 두고 긴장하고 있는데 나는 전혀 무관하게, 더는 세상에 그 무엇도 더 커 보이지 않는, 어떤, 좋고 좋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나를 보고 좋아 보인다고 했던 것일까?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렇게 수긍하였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 세상이 더는 크게 보이지 않는, 민감한 사안이 전혀 마음의 요동이 되지 않는, 심지어 탄핵이 가결되고 저마다 기뻐 날뛰거나 슬퍼 실의에 빠지거나 할 때 무덤덤하니 주의 섭리를 헤아리는 일.
그럴 수 있는 건 능력이다. 이 능력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결코 구도자의 자세 때문이 아니다. 은둔의 삶이 주는 게 아니다.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선 자의 무책임함도 아니다. 같이 마음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그 염려가 어떤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현실이 비현실이 됐다는 게 아니다. 여전히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하고 풀무 불에 던져질 것이며, 나의 엉덩이와 허벅지는 아프고 허리 통증은 여전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가끔은 이런 나를 나는 낯설어한다. 때로 아내는 나를 얄미워하고(본인은 교회 월세가 마련되지 않아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나는 그러려니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친구는 ‘팔자 좋다’는 말로 나를 비아냥거리고, 모두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해도, 때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은 나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냥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냥 좋은, 그 무엇. 참 좋아 보여요! 했던 아이의 말이 현재의 여러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좋아! 하고 말한 뒤 좋다는 조건을 찾으려고 하면 민망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이 능력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정의를 할 수 있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었다. 나도 때론 그 출처가 궁금하다. 창가에 서서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 일, 그 소리를 들으면서 막연하게 좋은 어떤 만족감이 그저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만족에 겨운 정도라면 좋을 이유가 안 된다. 보조기 나사가 헐거워져 뒤뚱 주저앉을 때의 당혹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남들처럼 대통령의 무능함을 욕하다 말고 문득 그 배후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머쓱해지는 느낌은 또 어떻고? 현실은 전혀 좋아할 ‘꺼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좋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이 주체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날이 추워지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때로는 고역이다. 알람을 끄고 뭉그적대며 더 자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진짜 나야말로 시간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니까, 얼마든지, 뭐 그럴 수 있는! 그런데 이걸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시간’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의 한 날 가운데 가장 지키고 싶은 시간이 바로 지금, 누가 본다고 이런 글을 쓰는가 싶지만 그런 게 아니다. 한 손으로 버벅거리며 오타를 연신 지웠다 새로 쓰기를 거듭하면서도, 말씀을 끌어당겨 옆에 펼치고 전날에 메모했던 것을 들추면서, 내게 주시는 생각과 생각을 따라가는 일. 감히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송구하지만, 저절로 이어지고 더해지는 나의 이야기 속에 주가 함께 하시는 것을 어찌 감출 수 있을까?
아이의 ‘좋아 보여요.’ 한 말이 오늘 아침 묵상 글의 화두가 될 줄이야. 그것으로 나의 여러 날들 가운데 ‘이처럼 그냥 좋아도 되나?’ 싶게 좋은, 좋고 좋은 어떤, 알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에 대하여 나는 충분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일일이 그럴 수 없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나열하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모르겠다, 나는. 저마다 나름의 확신에 겨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운을 입고 거리로 나서서 구국기도회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게 과연 하나님 앞에서인지 사람들 앞에서인지 구분하지 못하겠다. 종파를 드러내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서 있는 모습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그래, 그 또한 주께서 더하시는 마음의 열심일 수 있겠으나 내가 뭐라 할 게 아니라서 나는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지나보면 알 일이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잠 10:25).” 그러니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29).” 각자 자신이 믿는 바를 따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97:7).”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흔들림 없이 주만 바라며 살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 증거는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이라, 주가 빛을 더하실 것을 믿는다. 반드시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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