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전봉석 2016. 12. 9. 07:17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잠언 9: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편 96:9

 

 

 

역사적인 날이 밝았다. 탄핵이 어찌 이루어질지,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선명한 것은 우리의 악함이었다. 숨기는 자나 들추는 자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자나, 우리는 모두 해 아래에 부끄러울 뿐이다. 위하여 기도하지만 누굴 붙들고 뭐라 흥분할 게 못 되었다.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앞에서 떨지어다.’ 진정한 두려움이 주를 경외하는 척도이다. 뇌물을 받고 악을 도모하고 우선의 즐거움에 빠지고 자아실현에 열을 올렸던 그 모든 경로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여서이다.

 

나는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문다. 안타까움으로 청문회를 보고 담화를 듣고 저의 변명과 사람들의 추궁과 민심의 향배를 가늠하는 촛불집회를 보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것을 주장하다 얼마 지나지 않나 이것을 지탄하는, 이중적인 삶의 죄악 됨에 대하여 몸서리친다. 그래서 나는, 소리 내어 또박또박 성경을 읽는 것으로 내 할 일을 하였다.

 

아, 주님의 구애에 대하여!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이걸 이렇게 느껴도 되는가 모르겠는데, 아이가 너무 싫다. 기껏 오후에 들러도 되겠냐고 연락이 와서 시간을 조정하고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안 왔다. 또 아이를 얼레고 달래 위로하고 격려하며 괜찮다, 너 참 좋아졌구나, 하고 응원을 한다. 당장 어떻게, 그 이상의 보응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고 다시 또 부르신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15).” 그와 같은 주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나라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 감춰졌던 온갖 더러운 우상과 미신적인 행위에 대하여,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2:28).” 궁극적으로는 믿는 자들의 마음을 독려하심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고 영생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오늘 이와 같은 엄중한 현실을 마주하게 하신다.

 

이에 안 믿는 자들과 같은 시선과 목소리를 들내는 것은 옳지 않다. 뉴스를 보나 나 혼자 흥분하며 낯붉히는 일이 있다 해도, 누구를 붙들고 함께 설왕설래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혹시나 나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고, 내 마음이 한쪽으로 쏠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지나 않을까 염려돼서이다. 다 나름의 참여와 선한 의도의 자기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필리핀 동생과 통화를 하다 이를 당부하였다.

 

종일 어슬렁거리듯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어슬렁거렸다함은 본문을 읽고 또 한참을, 각 단락의 요지를 정하고서 또 한참을, 그렇게 초안을 작성하고 뒤미처 내용을 덧붙이면서, 그러는 동안 긴 설명은 빠지고 성경 인용과 요지만 남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닌데, 오후에 아이가 와서 글을 쓸 때 함께 앉아 원고를 마저 작성하기까지. 그 한참을 또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다루는 일이 모두 묵상이었다. 그러는 중에 오전에 소리 내어 읽은 예레미야서의 한 대목이 귓가를 맴돌았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2:13).” 이보다 더 명확한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는 게 또 있을까? 결국 하나님은 저들에 대해 노하시는 게 아니다. 너, 바로 나, 우리 ‘내 백성’ 되는 자들의 그릇 행함에 대한 것이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은 만민을 위한 것이나 지극히 제한적인 목소리다. 오늘 잠언은 이를 분명히 한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 9:9).”

 

그렇지 않은 다수의 익명에 대하여는 나도 모른다. 하나님이 어찌 행하실지, 저들이 어찌 감당할는지, 모든 일이 어떻게 될지, 그 결과가 어떠할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두려움으로 주만 바랄 것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 96: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는 자가 복되었다.

 

오후, 사장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초췌한 얼굴에 피로가 묻어있었다. 이런저런 자신이 고단한 생활을 늘어놓다가 뜬금없이 큰 아이 이야기를 꺼내며 어찌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얘기 끝에 필리핀에 있는 동생을 소개하였다. 그럴 수 있다면 아이를 유학 보내는 것도 좋을 거였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알 수 없으나 되어지는 일에 있어 나는 다만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이끄실 것을 믿는다. 그 일로 동생과 통화하고 이런저런 얘길 나누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는 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이 엄청난 특혜에 대해 나는 무슨 염치로 말을 들낼까? 기도합니다, 기도할게요, 하지만 정작 나는 마음에 담고 있을 뿐 더 어떻게 저를 아뢰고 구하여야 할지 모른다. 그런 나를 위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아침에 눈을 뜨고 비몽사몽 잠자리에 앉아 감사하다, 누가 떠오르고 어떤 일이 마음에 밟히면 나는 그저 주님, 하고 되뇔 뿐이다. 이를 어찌 기승전결 논리적으로 아뢰고 구할 수 없다. 아이를 생각하다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어떤 일에 대하여 마음을 쥐고 앉을 뿐, 성령이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다. ‘내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내가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신다.’ 그리하여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이 엄중하나 우린 표면적인 사건에 눈이 어두운 게 아니라,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무릎을 꿇을 뿐이다. 일찍이 모든 게 진멸되어 마땅한 원시 샤머니즘의 땅에 복음을 더하시고 오늘에 이르러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회복시키시고 돌이켜 주를 바로 아는 자리에 두시려고, 그러기까지 또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의 사랑을…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잠 22:19).” 아, 이것이 은혜이다.

 

그 장구한 세월을 두고 보신 까닭도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사 66:18).”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가 오늘 이와 같은 현실을 내게 두신 데는,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내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곧 ‘때가 이르면’ 주께서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주의 말씀이다. 이에 나는 어느 쪽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너머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주목하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와 같은 말씀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면서 가슴 저리지 않을 자가 누구인가? 울음이 어깨를 누르는 것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한없이 낮추신 바 되는 저 사랑의 구애 때문이다. 우리가 뭐라고,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참으로 크다. 크고 무궁하여서 어느새 울음이 복받쳐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의 약속하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2).” 이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다른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12).”

 

오늘 우리에게 향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찬송한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