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전봉석 2016. 12. 11. 07:35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언 11:30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시편 98:4, 8

 

 

 

‘어느 누구도 자신이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그리스도께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없다(-제임스 제니).’ 문장에 밑줄을 긋고 옮겨 적어서 여러 번 되뇌었다. 한참 지나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는다.’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오래 되새기다 그 의미가 서로 마주보고 있음을 알았다. 지혜롭다는 것은 주를 경외함이고 이는 ‘여호와께 즐거이 … 소리 내어 즐겁게 찬송하는 자이다.’ 찬송은 자랑하는 일이다. 자꾸 입만 열면 말하게 되고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고 권하여 같이 그 좋은 걸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은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낸다.

 

그럴 수 있겠구나. 행여 나의 이와 같은 글쓰기가 자의든 타의든 자칫 그리스도의 구원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데 그치고 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누구와 대화를 할 때, 어떤 문제에 나의 의견을 나타낼 때, 고의적으로 나를 나타내려는 건 아니었다 해도 은연중에 ‘그런 나’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마다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이다. 말씀 앞에 앉아 말씀 붙드는 일로 말씀밖에 답이 없다는 것을 새삼 확신한다. 말씀은 나의 중생을 증명하고 그 근거가 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말씀이 우리를 새로 낳았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러니까 구원은 말씀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은 입술의 덕을 은혜로 세워간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순결하고 선한 양심으로 믿음이 가능하게 한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결국 믿는 자로서의 기쁨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이 알게 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화도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최종적인 구원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증거 한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성도의 추진력도 말씀에서 얻는 거였다.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그러므로 말씀밖에 답이 없다는 확신을 다시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자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모두 말씀은 알게 하신다. 한낮의 토요일은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뽀얀 햇살로 정겨웠다. 아내는 한 시에 나와 같이 로마서를 읽으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항하려 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인 것을 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죄가 싫은 것이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오히려 즐겨하던 것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 대한(죄에 억매인) 강한 자존감을 경계한다. 그러니까 자아실현의 욕구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내가 즐기고,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그러므로 나를 드러내어 나타내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주의 은혜였다는 것.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결코 내 의지나 노력으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신득의와 이신칭의의 개념을 구분하며 우리가 우리인 게 모두 은혜인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득의는 얻은 것이고 칭의는 그리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에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그 목적은 분명하였다.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알게 하신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나는 결코 나로서 어떤 선이나 의도 도모할 수 없음을 안다. 별 것도 아닌 일에서, 누가 공간 안에 들어와 서성거리는 걸, 어디 오셨냐? 하고 묻다 괜히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이 있었다. 같이 있던 아내는 나를 진정시키다 말고, 목사님이 왜 그래? 하고 물었다. 그러게. 순간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하다, 아! 은혜가 아니고는 참으로 나란 사람은 가망이 없구나! 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뭔데 알려고 하느냐? 하는 말에 발끈했던 것이다. 가끔 나는, 나보다 더 우스운 이를 알지 못한다. 가장 다루기 힘든 위인이다. 조곤조곤 말하면 되지! 하고 핀잔을 주는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같이 앉아 성경공부를 하다니! 거참.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안에 얼마쯤 지나야 성령의 열매가 좀 맺어질까? 평안하고 별 일 없을 때야 누군들 거룩을 흉내 내지 못할까? 내 안에 두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위해서도 오래 참음이란 열매를 맺어가야 하는 것인데, 기껏 평온하였던 마음이 순식간에 흙탕물이 된 것이다.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내내 그 생각을 하며 부끄러웠다.

 

그래 맞다. 말을 사용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의 찬송이 되는 일이다. 같이 모여 앉아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만 찬송이 결코 아니다. 입술의 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 21:2).” 내가 아뢰는 것이 나의 소용과 도움만을 간구하는 게 아니었다. 이 또한 최종적인 목표는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 14:23).” 설교를 잘하면 뭐하고, 누구에게 위로의 말을 그럴듯하게 선사하면 뭐하고, 더욱 고운 말로 날마다 간증을 하며 산들 뭐하나.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주가 고치셔야 한다. 상대의 삐딱한 말투에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고 입바른 소리로 화를 내는 일이야 누군들 못했을까?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입술의 말을 고쳐주셔야 할 일이다. ‘내 입술의 말은 궁핍만 이룰 뿐이다.’ 한껏 고상을 떨며 말씀을 읽고 밑줄을 긋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성경공부를 할 참이었는데, 이런! 그러니 무엇을 장담할 수 있나? 내가 나를 확신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한 치 앞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정의를 위해 뭔가 대단한 위인으로 부르심을 받는 줄 아는데, 어림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시작을 완성하셔야 한다. 나를 부르시고 여기 두신 이가 나를 철저히 만들어 가셔야 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후 내내 나는 퉁명스러웠고 생각할수록 분한 마음에 씩씩거렸다. 말씀은 이처럼 나를 마주하게 하신다. 나의 본심과 마주하고, 그 안에 얼마나 유치하고 맹랑한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알게 하신다. 터무니없는 역정은 여전하여서 더는 내가 손 쓸 수 없는,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임을 알게 한다. 이런 나를 마주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이런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아,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 전혀 다른 사람인 나다. ‘새 노래로’ 찬송하게 돼 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2).” 내 앞에 두시는 전혀 새로운 나는 ‘그의 공의를’ 나타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에 신중하고, 이처럼 도달할 수 있는 언어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이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다. 지혜로 사람을 얻는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