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9
가만 보면 저마다 특징이 있다. 아 그것으로 힘에 부치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그러기까지 누군 자기불안에 흔들리고 누군 자기만족에 겨워한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안다.’ 누구 말도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이에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듣는다는 건 내어줘야 자리가 난다. 쥔 걸 놓지 않는 이상 잡을 수 없는 이치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왜 이 일이 그처럼 어려운가를 알겠다. 무슨 오디션 프로를 보다 심사를 맡은 이의 평에서 멋진 말을 들었다. ‘노래는 부르는 게 아니라 불러주는 것이어야 하고,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춰줘야 하는 것이다.’ 문득 인생도 사는 게 아니라 살아드려야 하는 말로 이해가 됐다. 사실 그 프로를 일부러 잘 보지 않는다. 아직 어리고 너무 여린데 죽어라 하고 자신을 연마하는 게 속상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이겠으나, 너무 벗었고 너무 선정적이며 너무 호소적이다. 하나님을 저만큼 높이고 그것으로 예배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모르겠다. 자꾸 나는 너무 애쓰는 게 옳은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그게 뭐든, 그러느라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등한시하거나, 말씀과 멀어지거나 외면하거나… 어느 세대나 그 시대의 문화란 가장 정교하게 하나님 없이도 잘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자긍하는 마음의 총아다. 특히 오디션 프로에서 심사위원의 평가 한 마디에 울고 웃는 걸 보면, 어쩔 땐 너무 속상해서 채널을 돌리곤 한다.
메모해두었던 존 던의 시(詩)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오롯이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대륙의 한 조각이니/ 본토의 한 부분이라……// 그러니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저마다 떠도는 섬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아이들을 대할 때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때론 힘에 부친다. 헌금을 드리는 일과 기도제목을 같이 나누는 일에 대해 아이는 거절하였다. 잘 모르겠다는 게 아니라 싫다는 거였다. 아이의 거절 앞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왜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나서는 데 만류하지 않았는지, 저가 밖에서 그처럼 추락하는 동안 왜 가만히 계셨는지, 지난 날 나의 오랜 배회를 주님은 내버려두심으로 마주하고 계셨었다. 이제 나는 확신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거나 잊고 계신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악을 범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곁에 사람을 두시고 도우시는 환경으로 이끄셨음을 안다. 아이의 섭생이 불안정한 까닭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를 어찌 지적하듯 말로다 권고할 수 있을까.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누구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곁을 두고 아이의 이름을 가만히 입에 문다. 주님, 하고 아뢸 때 아이를 떠올리며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생각하고 계심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나도 기다릴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좀 더디고 답답하다 해도, 우리의 승부는 이 땅이 아닌 거였다. 왜 그처럼 성경은 여유로운가, 알겠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이를 어찌 설득하여 알게 할 수 있는 문제던가.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19-20).” 더 나은, 더 뛰어난, 더 수고한 것을 선호하고 뽑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 의지와 노력으로 승부하려는 자들의 무모함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고 붙들고 애원한다고 해서 돌이킬 리도 없다. 끝내 돼지우리에까지 떨어지는 수밖에. 그나마도 축복이라! 끝끝내 돌이킬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참으로 무서운 건 죽는 게 아니다. 병들고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혹은 그것마저 의심하다 일순간 영혼이 떠나는, ‘소금기둥의 비애’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끝내 꺼리고 미련하게 여겨, 끝끝내 귀 기울이지 않고 의심하는 완고함에 대하여는 이제 두려워할 뿐이다. 내가 그러했고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해결이 안 되는 무엇.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이 당연한 이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이 수두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으나 가만 보면 그게 그렇다. 쥔 자는 놓지 않는 이상 잡을 수 없다. 듣는다는 건 내어주지 않는 이상 자리가 없다. 늘 허기를 느끼면서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때론 종교적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편견과 아집으로 방어하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누구도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찬송하는, 찬송이 되는 삶으로의 복됨에 대하여,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곧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주께서 더하시는 평안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19).” 잠언의 말씀은 언제나 명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장황하지 않다. 진리란 단순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시 99:2).” 이를 안다면 찬송하게 돼 있다. 입만 열면 자랑하게 돼 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참 두려움은 나를 드러낼 수 없다. 내 의지 내 노력 내 수고에 따른 주장이 불가능하다. 스물넷, 한 참가자가 심사위원의 말에 눈물을 지었다. 다 안다, 그 수고가 어땠을까? 하는 말에 그간의 서러움이 복받쳤던 모양이다. 덩달아 울컥하다가 그 수고와 애씀이 하나님께 향한 것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너무 극단적인가? 아직 젊은데, 살 날이 많이 남았는데, 이제 시작인데… 하는 말로 변명을 삼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외면하는 길에 접어들 수도 있겠다. 내 수고와 애씀과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만 알기를 작정하였다.’는 사도의 결연함이 크게 들린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주만 바라며 섬길 수 있다면. 우린 늘 ‘어제와 내일’을 두고 씨름하느라 ‘오늘’을 허비한다. 모든 오늘은 소비된다. 어떠하든 지금은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이미, 과거가 되었다. 과거는 없어짐으로 내일을 끌어들인다. 그리스도인이란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오늘을 산다. 천국은 언제나 오늘뿐이다. 영원한 지금이며 매순간의 머묾이다.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산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게 오늘 날의 문화일 것이다. ‘다 그래’라고 하는 말의 함정이었다.
바울 사도의 결연한 작정을 묵상함으로 오늘을 사는 가장 지혜로운 자세를 알 수 있다. 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삶으로, 그러므로 최종적인 구원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삶으로,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말씀을 붙든다는 건 단순히 위로를 얻거나 도움을 받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전부다. 다른 게 없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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