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전봉석 2016. 12. 21. 06:57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언 21:25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편 108:12

 

 

 

욕망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눈이 밝아져 알지 못하는 선악을 알고자함이다. 곧 그 선악의 기준을 자신으로 맞추려는 게 정욕이다. 정욕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겠어서 자신이 직접 욕망을 채우려는 조급함이다. 게으름은 해야 할 걸 미루거나 알지 못하는 죄의 속성이다. 이에 욕망은 영혼을 죽인다. 고통과 고난을 잠시도 견딜 수 없어 할 때 성급한 판단이 뒤따른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19-23).”

 

‘고통이 오히려 소망이 되어 주의 인자와 긍휼을 마주한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다.’ 참 아름다운 고백이다. 물론 결단코 고통이나 고난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한데 어떻게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잃고도 그처럼 자식을 죽인 자들을 양자로 삼을 수 있었을까? 가능할 것도 같다. 부산의 누구는 영국으로 아들 시신을 수습하러 가던 어느 노부부의 전도를 받고(비행기 안에서 말이다!)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힘은 의지나 결단이 아니었다. 곧 ‘주의 성실하심’ 때문인 것이다.

 

쑥과 담즙 같이 쓰고 괴로운 현실이 낙심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마음에 담았다는 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의 성실하심을 묵상하였다는 소리로 들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믿음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25).” 나는 할 수 없으나 할 수 있는 이가 계심을 바로 아는 것. 그러므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6).”


전도서도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 절대주권을 아는 이가 기다릴 줄도 안다. 이에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애 3:27-28).” 주가 두신 일이다. 그러하면 주가 이루신다.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랄 때 낙심하기 쉬우나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할 때 의연할 수 있다. 이게 뭐지? 싶은 낙심이 몰려와도 이에 주는 선하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바로 보는 시선은 이를 바로 표현하려는 노력에서 주어진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음미할 때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돼 있다. 곧 말하는 방식이 보는 방식을 주도한다.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면서 내가 이를 놓치고 싶지 않은 까닭은 그 이유다. 성경을 읽으면서 책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이를 묵상하여 이해한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러느라 말을 고르고 가장 적합한 언어를 찾아 설명하고자 하는 수고가 통틀어 묵상이었다.

 

결국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바로 그,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 있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이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이와 같은 바람이 나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말씀에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를 감탄하며 삶에 적용하게 하시고, 말로 혹은 행동으로 드러내기까지 내 안에서 거치는 것들, 나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게 하소서.

 

오늘 다윗의 기도가 그렇게 들린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08:12).” 내가 전에 의지하고 구하던 헛된 구원들로부터 놓여나게 하신 이가 또한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울도 간구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이와 같이 나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노력’이 곧 나의 정욕을 끊고 욕망으로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는 거였다. 어떻게 하면 더욱 선명하게 주의 은혜를 느끼고 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때론 아침마다 쓰는 이 묵상글을 위해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아들애가 새벽에 일찍 귀국하여 오는 길이어서, 자칫 묵상하는 시간과 겹치겠다 싶어서 더 일찍 일어났다. 이런 게 때론 나를 놀라게 한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묵상이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1-4).” 요즘 늘 화두가 되는 사건에서, 청문회장에서, 친구가 다녀간 자리에서, 어떤 아이의 사연에서, 나의 고달픔 육신을 통해, 읽고 있는 책에서, 말씀으로, 기도로, 마음 씀으로 지혜는 온 사방천지에서 부른다. 명철이 소리를 높인다.

 

그러므로 이를 놓치지 않고 귀에 담고 마음에 새기려는 데는 잠잠함이 필요하였다. 아이가 혼자 와서 글을 쓸 때, 심심하냐? 하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혼자가 아니고 어찌 글을 쓰며 심심하지 않고 어찌 책을 읽고 외롭지 않고서야 어찌 묵상이 이루어질까? 잠잠히 주를 바라는 것이 지혜였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이를 못 견디겠어서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게 욕망인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시 전한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곧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내가 잠잠히 주를 바라는 것. 그러느라 집중하고 거듭 되새겨 그 의미를 확장하는 일. 그때마다 새롭게 또한 신선하게 보이시고 말하게 하시는 주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움을 충만히 느끼는 자의 것이었다.

 

곧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곧 영광을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풍성하게 누리고자 하는 것이 곧 찬송이었다. 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보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참 의미의 묵상은 이를 소유한 자가 이를 잃지 않으려는 간절함이었다. 그리하여 더 많이 말하고 싶은 노력은 더 많이 볼 수 있는 힘이었다. 곧 내가 아침에 이와 같이 묵상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날에 나로 알게 하신 주의 은혜가 있어서다. 딱히 어떤 사건과 상황이 없었다 해도, 때론 책으로 혹은 한 줄기 햇살에서 주의 은총을 느끼게 하신 것이다.

 

고로 나의 글쓰기는 가치 있는 것을 같이 보고자 하는 수고이다. 이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이를 누군가 같이 사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누가 볼까, 혹은 누가 들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나에게 제일은 이와 같이 묵상글쓰기가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더 쓰려고, 더 옳게 보고 싶다. 참을 느끼려니까 자꾸 나의 거짓을 한탄하게 된다. 어찌 이를 해결할 수 없어서 더욱 주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주의 은총을 구하는 만큼 더욱 세미한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나 성경구절을 메모해서 창문에 붙인다. 그 앞에서 서서 책을 읽거나 성경을 볼 때 은연중에 더욱 바라고 구하게 된다.

 

주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기를, 그 아픔을, 어려운 처지를 돌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를. 그리고 옆에 적은 성구를 되뇌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때의 그 익숙한 도우심을 느낀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와 대화중에 격세지감을 느낄 때도, 어떤 부러움이 혹은 시기나 질투가 나를 엄습한다 해도 놓치고 싶지 않은, 값진 가치의 소중함인 것이다. 더 많이 말하고 싶은, 혹은 더 정확하게 보고 싶은, 그래서 더 분명하게 알고 싶은, 참 좋은 것. 이로써 나를 자라게 하신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을 더하실 것이다. 결국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2:14).” 아,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으로서 다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나는 다만 더 바르게 더 정확히 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묵상글을 쓴다. 이는 쓰는 동안의 문제가 아니라 쓰기까지의 일이었으며 쓰고 난 뒤의 일로 이어졌다. 더 알고 싶은 것이다. 더 갖고, 더 누리고 싶은, 아!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그런 의미였구나! 더 갖고도 더 갖고 싶은 것이었다. 한데 이 논리는 세상의 것과 달리, 그래서 자꾸 버리게 된다. 놓게 되고 쥔 걸 살펴 더 좋은 것을 위해 나머지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말씀이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오늘 나를 여기에 낳으신 이가 또한 오늘 나를 여기서 자라게 하실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붙드신다. (다음 말을 고르느라, 적합한 표현을 생각하는 일처럼) 그러기 위해 더욱 바르게 주의 사랑을 보고, 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전에는 그처럼 좋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아! 이 진귀한 보물 앞에 두 손을 높이 든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래서 그럴 수 있었구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