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전봉석 2016. 12. 20. 07:35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언 20:25, 24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8-9

 

 

 

저마다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 산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뭐라 이르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신대원을 시작하기도 전이었으니까, 몇 년 만에 친구 둘이 다녀갔다. 한 친구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잠깐 얼굴만 보았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은 돈벌이와 자식 이야기가 전부였다. 잊었다는 듯 너는 어떻게 지내냐? 하고 물어 교회를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나의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었다. 서로가 그럴 테지만 나는 저들의 이야기가 이젠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생활에 찌든 피폐한 영혼이 안타까웠다. 모든 화두는 돈이었다. 함부로 옳다 하고 시작했던 일이 평생을 붙들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덫이 되어 더는 다른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그래 맞다.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알 수 있으랴. 곱상하니 좋은 환경에서 자란 친구는 너무 거친 일에만 휘둘리며 살았다. 한 친구가 돌아가고 다른 한 친구는 후원헌금으로 10만원을 내놓았다. 저녁을 사고 나에 대한 안쓰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뭐라 설명을 할까 하다 그냥 두었다. 앞서 돌아간 친구는 늦은 밤에 카톡으로 케이크를 보냈다.

 

나는 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들이 어떠하든 나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어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는가를 안다. 다시는 그 어떤 조건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이 그저 나를 안쓰러워하는 정도의 삶이었다 해도, 도리어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나는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내 평생에 누리고 있었다(시 107:8-9).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수두룩하여 국민의 반 이상이 자신을 무교라고 대답하였다. 특히 20대는 65%, 10대는 62%가 그렇고, 불교와 천주교는 각각 296만 명과 112만 명이 이번 소요를 겪으면서 감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신교는 오히려 123만 명이 늘었는데 이는 대형교회로의 쏠림현상으로 나타났고 신천지의 득세가 이에 편승하였을 것이다. 모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며 새삼 교인 수를 운운하려는 게 아니라, ‘아직도 넌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새삼스러울 게 없어서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씀을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9).”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자로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감사할 줄 모를 때의 경고가 다음 구절로 이어졌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집을 새로 구입하느라 대출에 이자에 정신없이 갚아야 하는 현실과 다 자란 자식들의 경제능력이 어떤가를 자랑으로 여기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친구 앞에서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기본급 정도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하루 왕복 4시간을 선교단체에 출퇴근하는 딸애에 대해 저들에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껏 방학을 맞아 보름 정도 한국에 들어오는 녀석이 다음 날부터 바로 일당 얼마짜리 ‘노가다’를 나가서 얼마라도 등록금에 보태려고 한다는 말을 저들에게 어떻게 말할까? 속상하고 때론 안타깝지만, 나는 결코 친구 아이들이 부럽지 않았다.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 다 사겨보고 그러면서 그 집안 형편과 사정까지 모두 검증을 마친 뒤에나 결혼을 생각해라.’ 하고 아이에게 가르쳤다는 걸 자랑처럼 말하는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들 이야기에 나의 판단은 어리석어보였고 바라는 세상이야말로 허황되고 한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말씀을 떠올렸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이는 오늘 잠언의 말씀과도 이어져서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였다. 나는 성경의 경고가 두렵다. “네가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 … 포로되어 갈 것이라(48:7).”

 

과연 무엇을 자랑하며 의뢰할 것인가? 결국은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47:5).” 살기 어려운 점을 호소하면서도 그 삶을 자랑하는 것이다. 죽겠다는 말이 입에 붙었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피폐한 영혼이면서도 말씀은 싫은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멀리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할까? 주가 고치시고 돌이키시지 않는 이상 뭐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친구 입에서 튀어나온, ‘더 가지려면 쥔 걸 먼저 놓아야 하는 거야.’ 하는 이 말이 돈벌이에 급급한 오늘 자신의 일에 사용될 줄이야. 하긴 또 ‘사람마다 만족도가 다른 거니까!’ 하면서 나의 평안을 그리 가져가는 데야 별 수 없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이를 어찌 설명한다고 전달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우리의 수고와 노력도 모두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아무 의미도 아닌 거였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내가 저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 이처럼 주 앞에 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나로 하여금 나의 숨겨진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늘 수시로 이고 서는 죄악 때문에 때론 힘에 부친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38:4).” 뿐만 아니라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18:50).”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자의 겸손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69:1).” 주께 아뢰는 수밖에.

 

결코 내가 저들보다 나아서가 아닌 것을,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15).” 그러므로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16).” 나는 이제 내가 쥐고 섰는 것을 놓을 수 없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보잘것없고 대수롭지 않은 듯하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를 붙들고 확신한다.

 

오후께 동기 전도사의 추천서를 써주었다. 기꺼이 나는 저를 추천하였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주께서 가장 선한 길로 저를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낙향하여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며 공황장애까지 앓는 듯한데, 다시 사역지를 얻고자 하여 ‘목사 추천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얼마든지, 나는 그 너머에 있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다. 그 형편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듯 저를 혼자 두신 데는 다 의미가 있을 것을 믿는다. 우린 금방 또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기 일쑤지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으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19:26).

 

누군 돈을, 누군 자신의 신념을, 누군 가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붙들고 있었으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럼에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꾸 고맙다는 말에 나는 동기에게 얼마든지 이런 더한 부탁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아는 만큼 그 뒤에서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좌절은 있을 수 있어도 실패는 없다. 우리가 때로 용기를 잃고 공황장애에 시달릴지언정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일구어 가시는 주의 놀라운 구원사역이 있으심을 믿는다.

 

마치 낮 동안에 친구들 앞에서 나의 변변찮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게 하나님은 오후 들어 동기의 추천서를 써주며 주께서 실행해 가시는 놀라운 주의 섭리를 소망하게 하였다. 안 믿는 친구에게 이런 비밀한 역사를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이제 우선순위가 분명한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공황장애로 옴짝달싹 못할 것 같은데도, 우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남들 눈엔 너나 잘 살아! 하고 면박을 받기 딱 좋은 것이겠으나, 우리에겐 무엇보다 첫째 되는 우선순위가 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를 저들이 어찌 알까? 그래서 나는 기꺼이 동기의 추천서를 써줄 수 있었고, 몇 줄 남짓 그 내용을 적으면서 반드시 그처럼 인도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지금 당장 빌빌하니 고향 땅에 도망 가 있고, 우울감에 살만 찌고 하는 말마다 의욕이 없어 시들하나, 공황장애가 온 마음을 억누르며 ‘이래도 할래?’ 하는 그 길을 다시 더듬어 찾는 까닭은 분명하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기어이 우리는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세상 기준으로 너무 형편없고 가소로운 것이라 해도, 우리의 보물은 이 땅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어떻다, 말할 수 없으나 주는 언제나 선하심을 신뢰한다. 내게 이와 같은 영혼을 두신 분께 찬송과 경배를 올린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결국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