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잠언 22:17-18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시편 109:30-31
하나님의 본심을 읽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이를 듣는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어하는 자는 듣지 않을 것이다(겔 3:27). 들음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 귀하였다. 주가 회복시키신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11:19).” 주를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의 말씀은, 귀를 기울여 마음을 두라는 것이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보다 더 바른 신앙은 없는 듯하다. 결국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바로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간직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잠 22:17-18). 그런 자의 특징은,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저절로 자랑이 되어 드러내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시 109:30-31).
성경의 모든 지향점은 주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다. 때론 절망도 악함도 그릇 행함도 모두 한 데 이어져 흘러가는 곳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리하여 경계한다.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겔 16:15).” 주의 것인데 그들의 것이 되는 사태는 화려함을 믿고, 자기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은 반드시 물들게 돼 있다.
새벽 일찍 아들이 귀국했다. 같이 아침을 먹고 나는 평소대로 교회에 올라갔다. 점심께 막내 동생이 일이 있어서 오는 길에 들렀다 갔다. 아들 녀석은 서둘러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다들 바쁘고 분주한데 나만 늘 덩그러니 놓여졌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에스겔서를 읽었다. 살아 있으라, 살아만 있으라, 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6).”
궁극적으로 고통은 긍휼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되었다. 애가의 첫 마디는 절규다. “슬프다 이 성이여!” 예레미야는 시온의 고통을 노래한다. 그리하여 고통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애 1:11).” 결단코 고통이 좋다는 소릴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애가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된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3:1).”
3인칭일 땐 무난하여서 누구라도 조언할 수 있겠으나(욥의 세 친구들처럼) 1인칭일 땐 비로소 개인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19).” 그와 같은 고통이 도리어 소망이 됨을, 그럴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1-22).” 그리하여 찬송이 나오는 역설을 본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
한참 좋을 때라는 게 그만큼 위험한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아들 녀석이 그처럼 휑하니 나가는 것을 보고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도, 다 그런 건데… 그래서 결국 주를 바라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것일 텐데…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든다. 사람은 참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검지에 티눈 같은 게 하나 났는데 자판을 칠 때마다 찔끔찔끔 아프다. 손가락이 아픈 게 천하를 잃는 것보다 고통스럽다.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위태로운 존재인가? 아이러니한 게 인간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불복종 저항으로 유명한 평화운동가다. 그런 그가 실은 14살에 결혼을 하여 일찍 성에 눈을 뜨면서, 16세에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주변 여자들과 혼외성관계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미성년자와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문란했다. 테레사 수녀는 빈자의 성녀라 불리는 데 반해 자기 아집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의료시설도 거부하고 후원의 손길도 마다하며 자기고집을 부려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간 자들이 많았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돈에 집착을 했고, 개나 고양이 코끼리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엽기적인 실험을 했다. 전기의자를 도입한 이도 그였다.
흑인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섹스파티를 즐겼고, 젊을 때 그의 논문과 리포트는 대부분 표절로 드러났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비정상적으로 쾌락을 즐기고 도박으로 빚을 지기도 하였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아내에겐 냉혹했고 노동자를 거느린 귀족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은 농도를 많이 거느린 귀족이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돈을 흥청망청 쓴 위인이기도 하다(온라인 중앙일보, 20일자 참고).
그러니 예레미야애가의 강조는 뚜렷해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3:27-28).” 스스로는 정직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알아서 옳은 길을 찾을 수 없고 자원하여 선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도 다를 바 없지만, 누가 뭐라 해도 여간해선 듣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우리를 대하실 때, 하나님은 본심이 아니면서도 고통을 더하신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9).” 그러므로 성경은 이른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0).” 우리는 그리할 수 없지만 고통은 그 길을 터준다.
이에 해결점은 기도였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5:1).” 외면하지 않고 이를 직면할 때, 그래서 주 앞에 인정하고 자복할 때,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이를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어디가 아프고, 어떤 일로 힘들고, 무엇 때문에 실의에 빠질 때 나는 생각한다. 이것으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구나! 다른 수가 없을 때, 그와 같은 막막함은 오히려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데 집중하게 한다.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주의 성품을 묵상하게 하신다. 주는 선하시다.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 그런 주님이 오늘 내게 이와 같은 상황과 형편을 두신 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고 구할 땐 낙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구하여도 침묵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는 선하시다. 이 확실한 주의 성품을 바라고 구할 땐 위로가 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은 선명해진다. 이를 바로 알 때 심지어 나의 실수도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그러므로 에스겔서를 읽으며 ‘먹으라, 먹고 말하라, 넣으며 채우라’는 말씀이 뚜렷하게 들리는 듯하였다(3:1-2).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
좀 유치하지만, 소리 내어 읽으면서 입안에 고이는 말씀이 꿀 같았다. 이처럼 아침을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게 선하였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더 간결하게 혹은 감미롭게 주를 아는 나의 마음을 묘사하고 싶어질 때의 신중함이 그런 거였다. 너무 좋아서 아껴 먹고 같이 먹고 싶은, 내가 보는 것을 들려주고 내가 듣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고 되뇌는 어떤 간절함 같은.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가서 그들이 듣는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고 알려주고 싶은(10-11).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16:60).” 그래 맞다. 주는 내가 어릴 때 약속하셨다. 비록 나의 젊은 날이 주를 멀리하며 배회하던 시간으로 점철되었지만 이내 주님은 그 약속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그러므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곧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56:11).”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그러므로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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