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잠언 19:3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편 106:4-5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를 기억하시고, 주의 구원으로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주의 나라의 기쁨을 가지게 하시길…. 같이 앉아 얘길 나누다 그 성향과 마음 상태를 알 것 같았다. 한 녀석은 용무를 마친 사람처럼 일찍 돌아갔다. 한 녀석은 대표 기도와 헌금을 거부하면서 급기야 ‘현재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관없다는 식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전에 같으면 어떻게든 뭐라도 해줘야 하나 조바심을 부렸을 텐데, 그래! 그게 어디 인위적으로 되나? 오히려 아이의 당돌함이 주의 특별한 관심을 생각나게 하였다.
다 각자의 아집과 생각과 나름의 판단을 붙들고 서는 것인데, 그 또한 성령께서 어르시고 붙드셔야 어찌 감당이 될 일이었다. 신기한 건, 그럼에도 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게 여기는 것들이 때론 가장 위험한 법이다. 건강이 또는 잘 풀리는 일과가 아니면 평안함이나 만족함이 자칫 우리 영혼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아이가 너무 쉽게(?) 좋은 직장을 얻은 것이 나는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한 녀석은 좋은 대학에 가고 같이 바라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이 혹여 아이의 걸림돌이 될까봐 나는 기도한다.
녀석의 섭생이 자주 탈이 나는 게 신호이겠다. 말씀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그것이 괜한 소리 같아도 말씀은 틀림없이 무의식 너머 영혼 안쪽에 쌓여진다. 자아가 강한 아이여서 다만 이를 부정하고 꺼려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미련했던 일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령이 그리 하실 것이다. 저가 원망하던 그 하나님이 인자와 진실하심으로 아이를 다루실 것이다. 실은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잠깐 동네를 배회하듯 산책하며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가슴에 뭔가 얹힌 듯 답답하였지만 이내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깨달았다. 오게 하신 이가 또한 돌이키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신 이가 또한 바로 세우실 것이다. 주께서 하셔야 하고 하시는 것을 우린 목격하고 참여하는 자이다.
그래 맞다. 하나님을 잃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잃은 게 없는 것이다. 나의 지난날이 너무 먼 길을 돌아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으나, 돌이켜 하나님을 잃지 않았으므로 어느 것도 잃은 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38-41).”
주께서 그 정성과 마음으로 이 땅에 심으실 것이다. 말씀으로 되지 않는 걸 무슨 수로 붙들 수 있을까? 문제없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 자신의 문제로 씨름하다 주 앞에 나오게 돼 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42).” 축복은 항상 재앙 다음에 온다. 순순히 그 말씀에 준행하며 살면 좋을 텐데, 사람은 본래 그렇게 생겨나질 않았다. 어이쿠, 불에 덴 뒤에야 주의 하고 경계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뭐라 한들 아무 소용도 없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그 원뿌리는 교만이었다. 저는 기도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습니다. 나름 하긴 하지만 대표기도로 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이의 당돌한 말에 내심 그에게 얹힌 게 무얼까? 생각하였다. 권면을 들을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셔야 받는 것이다. 내가 이룬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언제 성경공부도 하고 싶다는 말에 그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저런 성향은 또 하자 그러면 움츠러들기 때문에 그냥 냅둬야 한다.
주가 하신다. 너무 무책임한 말 같지만 순응은 전폭적인 지지다. 전부를 건 신뢰다. 성령의 역사를 바라는 마음이 예언이다. 기도함으로 이루어진 줄 알라는 말씀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 그러므로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이를 의뢰하는 것이 예언이다. 정작 중요한 건 ‘그의 뜻대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결국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생성되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아이를 설득하고 권면하여 이끌고 권하여서 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성향이 참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내가 규합할 수도 없고 어찌 건사하여 이끌 수도 없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에서도 붙드는 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주셔야 하는 것이지 내가 나서서 건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 값을 무신 이가 또한 그 값을 찾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신다. 주를 떠나지 않게 하실 것이고, 우리로 이 땅에 심으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주의 약속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17-18).” 이와 같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막상 성급한 마음이 들어서 어떻게 뭐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 그냥 두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 말을 곱씹으며 뭐라 다독였지만 나는 그대로 두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의 앎이 학식으로나 공부로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속이 볶여 늘 섭생에 문제가 있고, 나름 분출할 길이 없어 비보이 춤을 추면서 자신을 볶는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가만히 지켜보는 게 일이었다. 곧 은혜를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나는 저 아이보다 먼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을 뿐이다. 이에 나의 수고와 노력은 내세울 게 없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사람으로, 오히려 막돼먹은 태도로 이를 거부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은혜였다. 모든 게 은혜이다. 만일 내가 수고해서 이만큼 얻은 것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나의 지분을 요구하며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 것이다.
은혜였다. 모든 게 은혜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 경건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맞다. 감사하자. 이와 같이 아이들 일로 씨름하는 게 복이다. 그러라고 주시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 게 일이었다. 그러라고 하나님은 내게 우리 자식들 일로 마음 섞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딸애가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고 아들애가 제몫을 다해줌으로써 나는 다만 교회의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은혜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내가 아는 것을 붙들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을 앎으로 더욱 믿음으로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거였다. 뭐라 아이에게 이르기보다, 참견하고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 나는 덤덤하니 말씀을 붙들고 서는 게 지혜였다. 주께서 보내시는 동안 다만 나는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뿐이다. 오고 안 오고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찾아온 이에게 말씀으로 대접하는 일이 목회였다.
아이가 대표기도를 거부해서, 심지어 자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그 또한 그럴 수 있는 것이 주의 사랑 안에서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온다? 주가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겠다.’ 주의 계획이시다. ‘그들을 떠나지 않겠다.’ 주의 약속이시다. 고로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겠다.’ 주의 보증이시다. 그리하여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혼자 흔들리게 두지 않으셨다. 이처럼 말씀으로 확증하시고 나에게 새 힘을 더하신다. 아이 때문에 내가 힘들어야 할 일은 없다. 오히려 말씀을 준비하는 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말씀 가운데서 찾아 그 증거를 삼는 일. 이에 따른 나의 확신이 부디 아이의 방황 가운데도 작은 불빛이 되어줄 수 있기를.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27).”
이로써 나는 더욱 주를 신뢰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23).” 이를 믿음으로 주를 찬송한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그리하여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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