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언 23:26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당신은 어찌 당신 아이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소? 그러자 그는 말했다.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도 배울 게 없다면 뭘 더 가르치겠나!’ 늘 이 짧은 예화를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아버지가 참 큰 어른이었다. 굳건함의 표징이었고 확고함의 기준이었다. 한데 오늘의 나를 보면 나는 내 아이에게 너무 초라하고 어줍기만 하다. 함량 미달이고 오히려 돌봐야 하는 존재다. 나는 아들이 어렵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곧 내 마음이 주께 드리고 주께 향하는 이 길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14:26).” 이를 앞에서 말한 예화의 근거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먼저 주를 경외함으로 ‘견고한 의뢰’가 있을 때, 나는 나의 사는 모습으로 교육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삶의 밑천이 있어야 할 테고, 이는 곧 ‘내 마음을 주께 드리며 내가 주의 길을 즐거워함’으로 드러나는 삶의 교훈이 아닐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카톡을 하다 ‘선생님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어요.’ 하는 말에 부끄러웠다. 과연 그런가? 나는 누구보다 의심이 많고 만족함이 없으며 자주 넘어지고 감사보다 염려가 더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자꾸 하나님 말고 다른 무엇을 의지하려하고, 그럴 때면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여실히 깨달을 뿐이라는, 그런 답을 하다 정말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한심한 위인인가 알 수 있었다.
성경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다보면 그 표현에는 물론 운율과 리듬에 놀라곤 한다. 각별한 비유와 어휘선택에 다시 한 번 놀라고, 그러느라 더 주목하였을 사건과 상황에 놀란다. 글쓴이 곧 성령의 감동으로 이 글을 기록하였을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무의식적으로 술술 풀어쓴 게 아니라면(성령의 감동이 그렇게 역사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이 직접 겪으며 치열했을 삶의 숨고르기는 물론 이를 기술하는 데 있어 그 단내 나는 언어 고르기 또한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주께 전심을 다하지 않으면 어림없었을 주의 길을 즐거워한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다. 더 신중하지 않으면 얻지 못했을 적절한 표현과 더 주목하지 않았으면 의미를 다 채우지 못했을 단어 선택에 있어, 그와 같은 수고가 곧 고단한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누군 돈벌이를 누군 학식과 명예에 누군 더 편한 생활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는 인생에서, 더 바르고 명확하게 주를 표현하며 이를 기록하는 일이란 그와 같이 사는 일에서부터 나오는 게 아니었겠나 싶은 것이다.
물론 이를 주목하는 데는 주의 권능이 우선이나 이를 알고 받아 순응하는 데는 헌신이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문득 ‘예정 교리’ 곧 ‘선택 교리’가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헛다리 짚듯 살아갔을까 싶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나의 헌신에 대한 지분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교만이 들어올 여지가 충분하니까 말이다. ‘행위 구원’의 허점이 거기 있다. 제아무리 겸손한 자이어도 내가 여태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기 수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니 내가 어떠하든 예정된 자요, 택하심을 받은 자로서,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7).” 이 구원의 즐거움에 있어 나의 권리가 없음으로 더 전적인 감사가 나오는 것이다. 늘 보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아등바등 속 끓이고 신음하며 살고 있는 자인데도 저들은 알 수 없는 참된 기쁨이 내 안에 있다는 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함께 ‘성도의 견인’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칼빈주의자는 아니어도 나는 그의 교리에 혜택을 입고 있다. 예레미야에 이어 에스겔서를 읽고 있으면서 저들이 당한 처지와 달리,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이 주목하는 것이 저들이었다는 데 부르르 몸이 떨렸다. 심지어는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겔 20:26).” 이와 같은 말씀에 밑줄을 그으며 그 사랑에 몸서리쳐졌다. 죽여서라도 살리시려는 주의 사랑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이 말씀을 단순하게 읽는다. 너를 죽여서라도 너를 살리겠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게 하느니, 나만 먼저 징계하시겠다는 것이다. 에스겔의 표현처럼 우리를 멸망하게 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역설이다.
곧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0:44).” 종합해보면 내 악과 더러운 행위에 따른 보응으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 주가 곧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예수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나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이름이다.
이를 오늘 내게 알게 하시려고, 모든 상황과 여건을 조성하신다는 논리가 성경의 이야기 구조다. 더욱 주의 영광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진술하기 위해 예레미야는 웅덩이에 갇혀 민족의 멸망을 애도했다. 아브라함은 무작정 말씀에 순종하여 무모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그 후손으로 삼으려 했고(창 15:2), 이후 아내 사라의 말에 따라 그녀의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로 기업을 삼으려고 했다(17:18). 이를 기술하고 있는 모세는 극적인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참 아들 이삭을 얻기 전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멸망을 진술하였다(19장).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주변국이 존재한다. 사건과 상황은 하나님의 치밀한 이야기의 배경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두시는 어떠한 환경도 여건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연출이었다. 왜 그럴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성경의 구조는 기승전, 영생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삶을 이롭게 하는 데 주목하신 게 아니다. 궁극은 구원이다. 구원은 영생의 필수다. 이에 우리 죄 값을 지불하셨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이제 명확해지는 것은 그러므로 오늘의 고초가 또는 징계가 결코 헛되지 않음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를 기술하여 오늘 나에게 들려주기까지 가장 적합하고 확실한 어휘를 동원하였다. 곧 오늘 하루에 두시는 모든 면면의 상황과 사연을 허투루 허비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담대히 주께 아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나는 구할 뿐이고 이를 들으심은 주의 일이다. 이에 접합점은 ‘그의 뜻대로’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더 무얼 증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기를….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나의 아들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내가 주의 길을 음미하고 즐거워하며 두 손을 높이 드는 이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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