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전봉석 2016. 12. 24. 07:39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잠언 24:26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적당한 말’을 찾아 이를 표현하는 까닭은 누리기 위해서다. 실제 말이 갖은 무게는 가히 폭발적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이 건설하는 세계는 놀랍다. 성경은 말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말은 ‘때에 맞는 기쁨’의 표준이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다. 적당한 말을 위해 신중해야 한다. 바로 볼 때 바로 들린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떤 걸 마음에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리 말하고 있었다. 성경이 권하는 말의 맛은 영생을 사모하는 이에게 천국을 느끼게 한다. 성경은 비유를 베푼다. 비유는 함축의 세계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말이다. 비유는 마치 팝콘과 같다. 본래는 딱딱하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일정한 열이 가해지면 부풀려 내용은 배가 되고 한 번 맛보면 자꾸 손이 간다. 비유는 잣 같고 밤 같다. 비유는 모든 글쓰기의 통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눌 19:11).” 예수님의 말의 구조는 비유였다. 잠근 것을 열 수 있는 키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지식도 어느 정도는 열고 설 수 있으나 또 다른 문에 가로막힌다. 오랜 세월의 수행과 덕으로 열 수도 있으나 그 또한 다른 문 앞에 서게 될 뿐이다. 지긋한 경륜이 문을 돌려보지만 그 정도뿐이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말이 필요하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결국은 성령이시다. 우리 안에 있는 여러 생각과 가치를 치우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수고가 따라야 한다.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읽고 쓰는 일이 글쓰기를 위한 것으로만 이해되진 않는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일이나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읽어내는 일에도 같은 의미로 적용된다. 쓴다는 것 역시 단순하게 글을 쓰는 정도의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건강과 지식과 형편과 관심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다.

 

이때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읽고 쓰는 일에 있어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이에 비로소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흔한 게 문제다. 읽기가 잘 되지 않는 이유다. 너무 쉽게 접하는 것들의 가벼움이다. 드라마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붙들고 저들의 말과 행동이 생활의 표준이 되고 있다. 웃자고 하는 말이 실재의 무게를 터무니없이 가볍게 측정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패러디를 좋게 보지 않는다. 자칫 풍자는 본질을 흐리고, 웃자고 든 말은 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텍스트는 모두 빨려 들어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 나날이 병들어가는 영혼이여.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본다’와 ‘읽는다’를 구분하게 한다. 본다는 건 생각 없이도 휘익 보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읽는다는 건 집중하여 의미를 살피고 이를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신기한 게 아이들이 책을 건성으로 읽었는데 물어보면 그 줄거리를 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건과 배경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게 또 거기서 전부일 때가 많다. ‘그래서’가 빠진 이해는 그저 본 것에서 조금 진일보한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천국이 아무리 좋으면 뭐하고 하나님의 의가 아무리 선하면 또 뭐하나? 예수께서 오신 이유와 목적이 ‘그래서’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 하는 게 곧 읽는 일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말씀을 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귀 없는 자가 어디 있고 듣지 못하는 자가 어디 있겠나. 다 듣고 다 귀를 가졌다 하나, 들을 수 있는 귀가 별개의 것인 이유다. 숱한 사람이 예수 앞에 모였다. 앞서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앞으로 많은 군중이 모였다. 헤롯도 이를 흥미 있게 들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 몇 년 사이 한국의 기독교가 숫자적으로 팽창하였다. 그래서?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은 올바른 자세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우선은 바로 듣는 데서 비롯된다. 무엇을 보느냐? 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는 모두 ‘적당한 말’로써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적당하다는 것, 무엇을 기준으로 기준을 삼고 있는가의 문제다. 며칠 전 ‘또 잠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가 전화를 해서, ‘사람마다 만족하는 만족지수가 다른 법이니까.’ 하며 나의 만족함을 그리 정의하였다. 그럴 수 있겠다. 적당하다는 말, 이제 나이 오십을 넘으면서 보니 어디가 좀 아픈 것은 본래 늘 아팠던 것과 버무려져 적당히 같이 가야 하는 것이 되었다. ‘만족지수’ 그 적당함의 표준이 말씀이기를. 예수의 이름이기를.

 

이에 “입맞춤과 같으니라.” 이 얼마나 시적으로 아름다운 표현인지 모른다. 내가 잠언을 좋아하는 까닭은 이내 매우 직설적으로 명료한 생활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고, 솔로몬의 지혜가 응축된 다양한 표현의 함의 때문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입 안 가득 고이는 말의 육즙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11:22).” 또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 하는 말씀 앞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2:15).” 아, 그렇구나!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맞다, 그래 맞다.

 

이와 같이 적당한 말을 찾는 데는 적당한 시선과 관심과 머묾과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사람처럼, 요즘 나는 성경을 일부러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면서 바로 그 ‘적당한 말’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에 놀란다. 비유는 나의 죄악 된 모습을 은유적으로 풀어내고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에둘러서 나를 그의 상에 초대한다.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내 잔을 넘치게 하신 것처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나는 또한 저들에게 주께서 베푸시는 잔칫상으로 초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루의 대부분을 나는 불안해하고 무언가로 불평하고 근심하고 또 짜증을 내며 공연히 화가 나 있고 괜히 걱정에 휩싸인다. 그러는 내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적당할 말로 대답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도 적당한 말을 더듬어 찾는 일에 쉬지 말아야 한다. 왜 말씀을 읽는지, 왜 신앙서적을 가까이 하고 늘 ‘그런 사람들’의 발자취를 음미해야 하는지 알겠다. 결국은 자신이 먹은 걸 소화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속이 볶이고 혈색이 안 좋고 급기야 어디에 문제가 생기고 더 심한 일에 시달리는 까닭은, 대체 뭘 먹고 살아왔던 것일까?

 

신세를 한탄하고 아무리 그리워한들 소용없다. 천국은 지난 세월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있는데 이 땅에서 불가능한 까닭은 모든 현재가 현재다 하고 느끼는 순간 이미 지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하늘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게 지금인 지금에서 모두에 오늘인 오늘에서 바로 이 순간인 순간으로 영원히 누리는 것, 지금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적당한 대답으로 드려지는 곳이 천국이겠다.

 

오직 참됨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이는 명료하였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담대함을 더하신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 그러므로 주 앞에 아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이에 순전하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어? 하는 순간 이미 비껴나기 일쑤인 만족함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천국을 맛본다. 단연 으뜸이 말씀에서다. 이처럼 구구절절 말씀을 따라가는 일에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 묵상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장차 천국에서 누릴 법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잃지 싫은 값진 가치다. 어? 하는 순간 또 휙, 하고 지나가는 기쁨이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단연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일에서다. 혹은 저에게 문자를 하거나 통화를 할 때, 그때 선택하는 언어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뚜렷한 건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간 삶의 발자취에서다. 결코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결정적인 안도다.

 

그 날이 되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 앞에 놀랄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저들은 ‘그래서’ 참았고, 그래서 더욱 당당하였으며, 그래서 더욱 인내하였다. 곧 그러기 위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였다(히 12:1).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으며 바울이 그러했고 디모데가 그러했다. 결국 저들의 공통점은 그러하였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랬구나!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다윗은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말씀을 붙드는 것, 이는 가장 적당한 말로 대답함이니 내가 죽어서도 이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도 이어질 대답이었다.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