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잠언 25: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편 112:1, 7
참으로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경외함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그것으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는 자이다. 곧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로서 이런 자를 일컬어 슬기로운 자라 한다. 그것은 책망을 청종하는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귀는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겠다.
과학 소설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는 후일에 신비주의에 빠져 불교 신자가 되었고, 이내 다음과 같이 인생을 회고하였다. ‘그냥 좀 더 친절해지려고 애쓰라.’ 참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고백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지독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모콤플렉스도 있었는지 모른다. 후에 그는 인생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인생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결국 들을 귀 없는 자들의 맹랑한 결과는 허무일 뿐이다. 저들은 세상을 사랑했다. 애굽에 기댄 이스라엘의 결과가 그 교훈이 된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겔 29:3).” 하지만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6-7).”
신기한 건 철학자들의 자살률이 다른 군보다 월등히 높다. 철학은 자기 수고와 의지로 세상을 알고 삶을 이해한다. 물론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철학을 가졌다. 믿는 자는 번번이 이것들과 싸운다. 늘 보면 원하는 것은 원치 않는 것보다 약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은 너무 쉽게 일어난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그러므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왜 자꾸 내 안의 나와 싸우는지 알겠다.
우리는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움직였다. 성탄절이 여느 이벤트데이처럼 되면서, 역으로 그 즈음을 더욱 조용히 보내고 싶어진다. 한낮에 아내가 나와 여느 토요일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청소를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주일에 쓸 장을 보고 들어왔다. 거리마다 상점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내는 좀 쓸쓸한 듯 어디어디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참 저녁 때 아파트 복도 어디쯤에서 새벽송이 울렸다. 가슴이 뭉클하며 나만 너무 동떨어져 있는가, 싶었다. 몇 차 촛불집회에서 캐럴 가사를 바꿔 부르는 데 가슴이 철렁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화하고 상품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젠 더 나아가 희화화하는 데 놀랐다. 하긴 교회가 앞장서 이를 조장하는 분위기니까 더 할 말이 없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의 결연한 고백이 새삼 눈에 띈다. 그런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이 이천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동일한 것 같다. 그저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예수만 좋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두려움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곧 고난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다. 이를 잃으면 복음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행여 세상으로부터 벗어날까 두려운 것이다.
톨스토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참 자유가 몰입에서 온다는 걸 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말해주고 있다. 몰입,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가운데 전력을 다해 집중할 때 누가 뭐라든지 참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그와 같은 몰입의 경지에서 사는 일이겠다. 그런데 또 재미난 것은 그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몰입이다. 어떻게 더 잘 하려고 몰입에 몰입할 때 몰입은 깨진다. 사랑에 대한 집착이 소유욕을 낳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다. 하긴 사람은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것만 말하고 관심을 두고 있는 그것만을 들으려고 한다.
이는 이천년 전 아덴 사람들도 똑같고 고린도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호기심이 늘 말썽이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8).”
그러므로 차라리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바울 사도는 역설한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저들 보기에 한심하고 답답한 게 몰입하는 자의 자유함이다. 그 확연한 특징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체험을 한다. 전에는 낚시를 하다보면 어느새 한낮이 하루가 훌쩍 흘러버려 놀랐다. 요즘은 아침 시간에 성경을 읽을 때 혹은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문득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흘러 있어 놀란다. 좀 어설픈 이해지만 천국의 시간 단위는 이와 같지 않을까?
아기 엄마가 사랑스런 아이를 돌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군 드라마를 보면서 혹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와 같이 몰입의 참 가치는 깨어나지 않는 것이다. 한데 이 땅에서야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어린왕자>의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도로 술을 찾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본질에서 멀어진 크리스마스를 다시 회복하는 길은,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전율하지 못하는 자의 서글픔이여. 아내가 즐겨보는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같이 보다, 저렇듯 귀신들의 이야기를 희석하고 죽음을 다음 생에 다시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해서야 사는 일이 너무 맹탕이지 않을까? 그저 예쁘고 달달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얄팍한 대사에 입맛을 다시고 등장하는 배우의 허울 좋은 외모에 눈요기를 하면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영혼은 무뎌지는 것이다. 솔직히 드라마를 잘 안 보는 이유는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허구를 허구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상술이다. 세상이 주는 달콤함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몰랐을 땐 모르지만 알면서도 그러기엔 자꾸 속이 불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값없음의 가치가 얼마나 지극하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수는 오셨다. 그 값을 지불하려고 오신 날,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지며 저마다 흥청망청 즐겁고 재미지고 달콤한 것에만 빠져든다는 게 왠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교회는 이제 숙연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행여 내 말은 경건을 강조하느라 기쁨을 도외시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기쁨이 세상이 주도하는 방식으로야 어렵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나는 결코 경건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남편 카레닌의 사랑보다 더 열정적인 정욕의 브론스킨과의 사랑으로 급기야 파국에 치닫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려지는 레빈과 키티의 사랑은 늘 티격태격 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더해간다.
참 자유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런 자는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데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일이다. 이에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값지다. 이를 들을 수 있는,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귀하디귀하다. 이와 같은 소중함을 더욱 바로 알기 위해서도 말씀에 몰입하는 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몰입이 주는 참 자유를 누리며, 천국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성탄절 아침, 주를 경외함으로 더욱 주만 바랄 수 있기를. 엉뚱한 소리 같지만 그리므로 주님의 부활을 감사드리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감히 말하건대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이 없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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