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전봉석 2016. 12. 27. 07:22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잠언 27:11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8

 

 

 

내가 지혜를 얻을 때 주의 마음이 기쁘시다. 주를 비방하는 자 앞에 나의 지혜로움은 대답거리가 된다. 지혜란 주를 경외하는 것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무슨 말을 어떤 생각을 하고서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주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 마음을 누가 준 것인지를 바로 아는 일이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욥 38:36).” 그러므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이를 아는 내가 주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주의 대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이를 누가 만드시는가? 전혀 그럴 리 없을 것 같던 사람을,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물론 나는 여전히 단단하고 어떤 이보다 자기 아집이 강한 자이지만 그런 나로 하여금 샘물이 되게 하신다. 곧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내가 노력해서 한 일이면 할 말이 좀 있을 텐데, 나는 여전히 둔하고 단단하여 샘물과는 상관없는 위인으로 살 때가 더 많다.

 

모처럼 가족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였다. 겨울비가 흩뿌리는 날씨 탓에 유난히 몸이 아파 쩔쩔맸다. 서로들 같이 늙어가는 모습이 정겨웠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다음 학기 아들 등록금 때문에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또 도움을 더하셨다. 그저 나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라 송구하고 감사하였다. 다들 바쁜 일정을 따라 움직였고, 나는 돌아와 누웠다. 아버지는 어떻게 우리 형제를 이처럼 키워낼 수 있었을까? 나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그리로 피할 뿐이다.

 

그런 거 보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덴 유리하다. 오히려 건강함, 평탄함, 좋고 좋은 것들이 위험하다. 분명히 귀한 은혜이고 값진 선물이지만, 간수를 잘못하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어떨 때 주를 더 바라고 구하였는지를 보면 확연히 구분이 된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 이때가 언제던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다. 오히려 모멸감에 괴로워했어야 하는데,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1).”

 

때론 나를 어렵게 하는 몸과 여의치 않은 형편과 자꾸 궁지로 모든 것 같은 환경이 지긋지긋하다가도 그것이 되레 주를 바라고 구하는 원동력이 되는 걸 보면 놀랍다. 좋을 리 없는 것이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다윗의 증언을 좀 더 들어보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 이런 고백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잘 안다. 어쩌나? 하고 염려하고 있을 때 주님은 어김없이 응답하신다. 그럴 때 주께서 보시는 건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이다.

 

곧 주를 찾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 그러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14).”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 치며 안간힘을 쓰느라, 주의 도우심보다 나의 수고와 애씀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악이다. 성경은 이를 늘 완강히 지적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우리의 시각은 그래서 더 열심히 분주하게 악착같이 노력하는 것을 선이라 여기지만, 주께 향하여 상한 마음으로 통회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때론 궁상맞고 그래서 빙충이 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모멸감만큼 교묘한 교만도 없다. 생각하는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마음에서 버티는 게 자존심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이 원리가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었다. 그저 나는, ‘감사합니다.’ 하는 말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였다. 조금 누웠더니 허리가 나아졌다. 멀뚱하니 있는 아들애와 영화를 보러 갔다. 비는 그치고 바람도 순하였다. 훤칠하게 커버린 아들이 가끔은 낯설었다. 맨 뒷자리를 잡아 가끔은 서서 영화를 봐야 했다. 모든 게 괜찮다. 고맙고 감사하였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나를 홀로 두실 때도 혹은 고달픈 마음과 육신으로 시달릴 때도 주님은 가장 선한 것으로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신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그때마다 더하시는 주의 손길을 느낀다. 나는 이 원리를 다음 구절에서 느낀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성경의 원리는 아이러니다. 예상 밖의 결과로 모순되는 것 같다. 한데 가만히 보면 내가 얼마나 모순된 삶을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배부른 자가 만족함을 느끼며 살 것 같은데 저는 꿀이라도 싫어한다. 주린 자가 고달플 것 같은데 저는 쓴 것이라도 달게 여길 줄 안다. 감사에는 조건이 없다. 어떤 때 이뤄지는 감사는 일시적이나 항시적으로 누리는 감사는 조건을 초월한다. 감옥에서도 찬송이 나오고 사자 굴에 던져지면서도 감사가 나온다. 이를 어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애써 무엇을 어떻게 수고하여 얻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 딸애가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주어서 봤더니 2만원이었다. 저녁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거룩과 성화>, <창세기> 그리고 존 파이퍼의 <순교의 영웅들>이 도착하였다. 아내에게 2만원을 건네며 책값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로 거두는 게 지혜였다. 이는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화평함으로 이어진다. ‘관용과 양순함’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모든 게 어찌 노력으로 가능할 일인가? 주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으면, 화평하다. 다른 모든 건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편견과 거짓이 없어야 하는지, 그 결과로 편견과 거짓이 없어지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편견과 거짓이 없음으로 긍휼하고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항상 보면 내가 꿈꾸는 나와 실제의 나는 그 괴리가 크다. 한데 이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게 지혜의 단초였다. 기어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낄 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어느새 나는 주를 경외하게 된다. 내가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를 경외하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잠 16:21).” 그러므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평소에 그렇지 못한 자로 사느라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절실하게 바란다. 행여 내가 그렇게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그리 살고자 하여도 나는 그리할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그와 같은 현실이 나로 하여금 더욱 송구한 마음으로 주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가끔은 이와 같은 나의 묵상글이 행여 나를 포장하는 것 같아 두렵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고 한심하고 막돼먹은 인생이라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이다. 누구보다 완고하게 고집스럽다. 나도 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감당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앞서 간 저들이 돌아보았을 지점에서 나는 더욱 그들의 발걸음을 따르는 일. 이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온전히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는 건 그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다. 주의하는 건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고 내 생각을 뒤로 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일로써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성령이 하신다. 결국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서로를 위해 간구함이 거기 있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