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언 26:16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113:1-2
그래도 올 수 있는 아이들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마침 아버지가 설교를 해주시는 주일이어서 성탄을 축하하면서, 창립 7주년이라, 송구영신으로, 각각 축복기도를 받을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늘 그럴 때면 와야 할 아이가 생각난다. 여기서 ‘그래도’와 ‘마침’의 의미는 선명하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예배할 수 있어 기뻤다. 주님은 맞춤하니 거두신다. 나는 어설프지만 주님은 한결같으시다. 마침 그때마다 내게 상을 베푸신다.
모처럼 막내 동생네도 와서 부모님을 모시고 저녁을 먹었다. 왁자한 집안 분위기에 내 의지와 달리 불안감이 옥죄었다. 그것은 내 몫이다. 늘 보면 돌봐야 하는 사람이다. 때론 성가시고 민망하고 송구하지만 그래서 화가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왜 넌 그러냐? 하고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녀석은 급기야 집에서 쫓겨났고, 정신병원을 다니고 안정제를 먹었다. 왜 그러냐? 하고 묻지 않았다. 한 아이는 무엇을 찾으려는 것인지 태국과 네팔, 인도로 긴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누군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행여 교회를 등질까봐 안타까웠고, 누군 여전히 자기 틀에 갇혀 대화에 끼지 않았다. 넌 대체 왜 그러냐? 하고 물을 수 없었다. 우리의 그런저런 문제를 주 앞에 내려놓지만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보다 그 문제로 주의 기이하심을 마주하게 하신다. 성격도 기질도 못난 자아도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이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때에 맞는 기쁨을 누리는 일로 드러난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나의 모자란 부분이라면 바로 그 모자람을 펼쳐서 주의 은혜를 담는다. 아이들의 이런저런 심정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나만 확실한 건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이 부름은 제한적이다. 그리 여기는 자가 고개를 들 것이다. 이때, ‘찬양하라.’ 말씀하신다. 그런저런 어려운 사정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운행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찬양이란 왠지 좋을 때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제부터 영원까지’다. 지나간 것에 대하여는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넌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이루시는 역사도 아니라 ‘그 이름, 예수.’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13).”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주목할 때, 때론 낙심하고 실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일을 다 가늠하지 못할 때가 있어서다. 당연히 나의 요구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님은 이미 한정된 ‘어떤’으로 제한된다. 이는 각자의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억지다. 위태로워서 곧 허물어질 모래성 같기도 하다. ‘어떤’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늘 ‘어떠하든’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게 더욱 안전하다. 그는 선하시다. 이미 ‘어떠하든’을 내포한다.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 더 어렵고 힘들 일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 때로는 방관하듯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용해된다. 앞서 내가 느끼는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기 판단과 기준에 의한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를 불안할 때 더 선명하게 느낀다. 나의 신경쇠약은 무작위로 감정에 휩쓸리게 한다. 맞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상황인데도 혼자 불안하여 쩔쩔맨다. 그럴 때 진가를 발휘하는 건, 선하신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하나님은 나를 그런 자리에 두신다는 것.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 되심을 바라게 하신다는 것.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상황에서 드려지는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는 선하시다.
결코 나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어찌 나의 이해와 상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칫 내가 아는 성경을 나의 기준으로 삼는 잘못을 저지를까 하여, 하나님은 내게 우울감을 두신다. 불안감을 해소하게 하지 않으신다.
오죽하니 아이가 제 발로 정신과를 찾았을까? 나는 곁에 앉아 가만히 아이 등을 쓰다듬었다. 오죽했으면 겁을 잔뜩 먹고도 여행을 감행하려 할까? 나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다 저마다의 어쩔 수 없음이 저들로 하여금 간절하게 한다. 이때 그 간절함이 무엇에 소용되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주관하시는 이는 ‘어찌됐든’ 선하신 나의 하나님이다.
순전함으로 주께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자가 복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에 주가 허락하심이 담대함이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 때론 현실이 혹은 나의 어리석고 답답한 기질이 쇠사슬로 나를 묶는 것 같다 해도, 담대히 할 말을 하게 하심이다.
그 이름을 찬송하는 것. 그런 와중에도 주의 이름을 의뢰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 22:30).” 다시 말하지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그럴 수 있는 것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143:8).”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내게 두시는 여러 악조건을 사랑한다. 싫은데 원망하지 않는다. 낫고자 애쓰기보다 두신 이의 선하심을 붙든다.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고로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립니다. 이윽고 이와 같은 고백으로 드려지기까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 어떤 불안이 혹은 염려가 아쉬움이 답답함이 그 어떤 부정적인 마음이라 해도 이 모두를 통틀어 이로 인하여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곧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잠 22:19).” 우울감을 혹은 불안을 또는 얼토당토않은 염려 가운데를 지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한 마디로 어떠하든 주의 이름을 의뢰하며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선하다.
이를 게을리 할 때 그 완고함은 더해져,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런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면서 미룬다. 온통 핑계다. 할 말이 많다. 자기변명을 그치지 않는다. 억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고작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14).’ 환장할 노릇이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5).’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어떠하든,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 내가 안 한다고 해서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지 못하심은 없다. 이미 만물이 앞서 주를 찬송하였다. 창가에 놓은 화분에서 다 시든 줄 알았던 잎사귀가 빨갛게 물들면서 성탄을 축하하였다. 계절은 정직하였고 햇살은 눈이 부셨다. 사람은 더디지만 나무와 새와 바람과 햇살은 여전하였다. 에덴 이래 한 번도 주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내게 두시는 모든 것은 온전히 주만 바라게 하시려는 주의 가장 선하심이다. 어디가 아프고 뭐 때문에 마음은 무겁고 예기 불안은 늘 나를 옥죄고 때론 짜증이 올라와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날 때도, 이 모두를 통해 하나님은 선하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이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100:5).”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6:1).”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7:1).”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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