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잠언 28:2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몸과 마음을 다해 위하는 것이 충성이다. 다한다는 표현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죽음으로까지 그 값을 다하는 것이겠다. 이에 상대적으로 두고 있는 이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다. 죄의 다른 얼굴이 성급함이었다. 빨리 무엇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을 기다리기 힘들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게 죄의 속성이다. 욕구를 채우려 죄는 난무해진다. 알아서 얼른 결과를 바란다.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를 불러 세운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가 주를 경외하는 게 맞는다면, 주를 의지하여라. 그는 도우심이요, 방패시다.’ 이를 가장 묵묵히 삶으로 실천한 이가 노아였다. 가끔은 내 안에 성급한 생각이 들 때 노아와 방주를 묵상한다. 본래 방주는 심판이 있기 전까지 아무 쓸모도 없다. 심판은 묘연하고 헛세월을 보내는 듯 그날이 그날인데,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안의 막연한 불안과 의심은 또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충성이 아니고는 어림없었을 텐데….
무슨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마음이 성급한 것은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늙으나 젊으나 눈에 보이는 게 아니면 금세 판을 갈아엎기 일쑤다. 그런 친구가 있다. 젊어서부터 직업을 수십 개는 가지고 살아온 것 같다. 그 친구 왈,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접어야 하는 거야! 나는 그의 단호함이 서글펐다. 얼굴은 까맣게 죽었고 손은 고생을 말해주듯 곱았고 가족과는 흩어졌으며 여전히 지금 하는 일도 임시직이었다. 너무 단적인 인물이라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그래서 그는 종교도 가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경계하라.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겔 32:19).” 밑줄을 긋고 메모하였다. 애굽은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는 자였다. “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32).” 그러므로 잠언은 이를 분명히 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잠 11:22).”
문득 나는 내가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는 줄 알았는데 말씀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거였다. 어디 한 구절이라 해도 그 안에 성경 전체가 담겨 있고 그 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노아가 그 장구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붙들린 게 확실하다.
당장 사자 굴에 던져질 게 빤한데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확신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설령 그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일, 충성이란 죽어지기까지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다. 그러나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의 것으로 결과를 삼을 수는 없다.
어떤 이는 하나님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는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4-9).”
그러니 이런 모습을 볼 때 누군들 부럽지 않을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우리의 충성을 흐트러뜨리는 이와 같은 현상은 부지기수다. 안 믿는 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정말이지 적당히 잘 믿고 잘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굳이 성경에 억매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소신을 믿음으로 여겨 교회에서도 제 몫을 다하는 듯하고 세상을 누리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는, 누군 저렇게도 잘만 믿고 잘만 사는데… 싶은.
그렇게 보면 성경의 사람들이 미련하게 여겨진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는 아브라함을 보며 뭐 꼭 그럴 거까지야, 싶고. 숱한 광야를 떠도는 다윗을 보며 뭐 굳이 그렇게까지, 싶은. 두 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행보는 또 어떻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 버려도 이 말씀 하나로 생을 다한다 해도 무리가 없겠다. 다 잃는다 해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믿음 하나면 족한 것이다.
가장 크고 확실한 신비는 믿음이다. 왜 믿어지는지 알 수 없는데, 증명할 수도 논쟁할 수도 없지만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이 복이었다. 한 녀석이 그렇게 말썽을 부리더니 급기야 집에서 쫓겨나 늙다리 노총각 외삼촌과 살게 됐다. 앞서 찐하게(?)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 뒤 정신병원엘 다니고 있다. 말인즉 그렇다는 것인데 녀석은 본래 강한 놈이 아니다. 척 하느라 몸에 문신을 하고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눈에 띄게 분홍색을 좋아한다. 들어 처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성경을 읽으라고 말했다. 내 전철을 밟는 것 같대나? 나는 목사가 되기를 기도하겠다고 답을 하였다.
그런 거 보면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한다. 참 죄란 게 무섭다. 끝내 살아서 사는 동안에야 비로소 돌이키는 것이다. 것도 어디 그냥 되나? 다 망가지고 줘 터져 더는 두 손 벌릴 데조차 없어야 기어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보면 애고 어른이고 예외는 없다. 다 자기 기준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어서 끝내,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신이 옳은 것이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영적으로 게으른 것이 세상적으로 부지런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앞서 말한 내 친구처럼, 나는 저보다 부지런한 이를 알지 못한다. 늘 열심히 산다. 소말리아 해역에서 침몰한 선박을 끌어올리는 직업도 가졌었다. 서너 달 일하면 몇 천을 번다는 게 저의 자랑이었다. 한강에 투신한 시신을 건져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디서 밴드를 하기도 하고, 그는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성실하였다. 또 한 친구는 평생을 야근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새 설계도면을 그린다. 그와 만나려면 몇 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그런 나는 젊은 날 내 곁의 위대한 저들을 닮고 싶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선생은 그와 같은 삶을 위해 교회도 하나님도 천국도 나중으로 미뤘다. 급기야 다 그게 그거라는 논리로 자신을 무장했다. 수 십 년 기자 생활을 접고 뜬금없이 사업을 시작해서 얼추 또 수 십 년이 지나면서 나름 성공된 CEO가 되었다. 두말할 것 없이 존경스럽다. 한데 그의 부지런함이 그의 영혼을 게으르게 하였다. 기어이 하나님은 없거나 모두가 하나님이란 논리로 더욱 자유로워졌다!
저들에게 오늘의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매일 같이 송판을 엇대고 이어 날라 산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노아의 모습이 한심하고 처량한 것이다. 방주란 본래 심판이 있기 전까지 쓸모없는 것이다. 심판은 묘연하여 세월만 흐르는데,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괜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어쩐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전부를 건다.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내가 보는 것이 저들로 나타나는 세상에 있지 않다. 그래서 누군 집을 늘리고 재산을 쌓아 노년에는 외곽으로 나가 전원주택에서 텃밭을 일구며 사는 것이 목표다. 누구는 학식을 더해 사람들로부터 더욱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누구는 넓은 세계로 나가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게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보는 나의 세계는 저들로 나타나는 이 땅의 세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게 나타난 것의 전부가 아니다.
말씀하시고 말씀에 거하며 말씀으로 뜻하신 바를 이룬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일은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는 생명으로 사는 일이다. 이는 주신 바 한 날의 삶으로 족하며, 두신 바 내 일의 모든 영역을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말씀이시라.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저마다의 꿈이 다 거창하였지만, 나의 한 가지 소원은 이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 충성된 자로, 몸과 마음을 다해 주만 바라며 산다는 게 동행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시 11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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