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전봉석 2017. 1. 3. 07:30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1-3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행여 문제가 생기지 않게 아내를 누이라 속였다(창 12:14-20). 여기서 나는,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16).” 세상의 후대함에 주목하였다. 세상이 주는 친분과 성의는 그게 아무리 진실 되다 해도 정작 하나님께 충성하려 할 때 큰 걸림이 된다. 짐작하지만 여기서 ‘애굽의 여종 하갈’을 얻었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선택은 쓴 경험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어제의 선택에 의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싫든 좋든 매순간이 선택이다. 어떤 말을 하든, 무엇을 바라고 구하든, 이내 자신의 길을 굽게 하고 뒤돌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경고하신다. 크고 작은 사건으로, 주변에서 혹은 직접적으로 경고하신다. 오늘 잠언은 이를 싫어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그저 좋다 좋다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마치 장사하는 이의 입바른 소리처럼 가벼울 따름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생의 한복판에서 그 경계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 지혜였다. 늘 이 순간은 내 생애 가장 오래된 지점이며 동시에 남은 날의 첫 걸음이기도 하다. 그 가치의 기준을 말씀으로 두고 설 수 있는 것이 복되었다.

 

객쩍은 소리지만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린다. 교회에 앉는 의자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사장이 마음에 쏙 드는 소파 세 개를 필요하면 쓰시라, 하고 가져다 놓았다. 들어오는 입구가 허전한데 싶었더니 화분 두 개를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단순하여서 하나님이 교회를 가꾸어가시는구나, 여겨졌다. 저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저의 이모가 하실 조산원을 꾸미기로 했다는 것, 사모님으로 오랫동안 목사님을 내조하며 교회를 이루어오던 이였다.

 

어디가 아프다, 자꾸 일이 꼬인다, 아이 일로 마음이 어렵다, 아내와 다툼이 생겼다, 돈이 모자란다, 등등. 실제적인 문제가 닥치면 나는 그것이 경고음으로 들린다. 그것으로 피로를 느끼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때에 대해 조바심을 느끼는 것이구나! 생각한다. 어떤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되 여기저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더욱 그렇다. 성전으로 향해 가는 두 번째 노래에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어떠하든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간단한 진리 앞에 서기가 얼마나 더디고 힘든지 모른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의 선택도 그와 같은 교훈을 준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그런데 놓치기 쉬운 구절이 그 앞에 먼저 서술되어 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9).” 분명히 그는 앞서 주 앞에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8).”

 

한데 왜 슬금슬금 남방으로 옮겨갔던 것일까? 기근이 와서 남방으로 옮겨 갔던 게 아니다. 슬금슬금 남방으로 옮겨가다 기근을 만난 것이다. 문맥은 그렇게 그려주고 있다. 안이했던 것인지, 혹은 나름의 주도적인 판단에서였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종교적으로 예식을 다했다. 단서는 벧엘과 아이 사이였겠다. 아이는 죄악 된 세상으로 이해된다. 어쩌면 우리 믿는 사람들의 형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완전한 벧엘도 그렇다고 철저한 아이도 아닌, 서쪽과 동쪽에 두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을 산다.

 

이럴 때 나는 도우심이 어디서 오나, 두리번거린다. 혹시나 하는 바람도 또는 어떤 상황에서 나는 눈을 들어 산을 보는 것이다. 당연히 도우심을 바란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원한다. 여기까지는 선하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필요를 바라고, 어떤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더 높은, 나를 도울 수 있는 실체를 찾는다. 하지만 이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심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의 도우심’이 아니라 ‘그’이시다.

 

믿음의 실체란 결국 다 덜어낸 후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뭘 바라고, 그것 때문에 간절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구구절절한 실제 이전의 실체다. 나를 도우시는 이가 하나님이시지만, 도우심 때문에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의 도움이시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이와 같은 묵상이 내게 유익하다. 오늘 시편의 기도는 이를 알게 하신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만일 도움이 목적이라면, 높은 산 중에 하나일 뿐이다. 시인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저는 천지를 지으셨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주시려는 것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그런데 우린 도우심을 바라지 여호와를 원하지는 않는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남방으로 옮겨가는 삶으로 드러난다. 이윽고 애굽이었다. 세상적인 것보다 종교적인 게 더 위험하다. 믿음이 없는 것보다 믿노라 여기는 자기 확신이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아, 그래서 죽어야 사는 게 그리스도인이었구나!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그래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런 거였다.

 

이게 그러니까 개조의 차원이 아니었다. 성격이 바뀌겠지, 기질이 달라질 거야, 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격과 기질은 그대로인데 그것의 주체인 생명이 완전 새로운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정답은 그리스도였다. 그의 사랑도 자비도 인애도 희생도 아닌 그,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 목적이셨다. 그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 그런데도 여전히 여기,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채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덜컥, 무슨 문제가 터지면 그때에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애굽으로 내려갔다. 나름의 방책을 강구하며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그러게.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나의 수고와 애씀,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주의 보혈을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주 앞에 서면 설수록 나의 죄악 됨은 더욱 크게 부각되는 것이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이처럼 나는 아무 쓸모없는 죄인인 것을 재확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게 주된 이유였다.

 

고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나는 주의 뜻을 어찌 행하는가, 하는 게 아니라 나타내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결코 행할 수 없다. 어떠하든 누추하다. 다만 이 누추함을 통하여 주의 거룩하시고 자비하심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훌쩍 2주가 지나 아들애가 다시 필리핀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마음은 짠하고 어떤 서글픔은 나를 몸서리치게 하지만 이루어 가시는 주의 거룩하심 앞에 찬송과 영광을 올린다. 오늘 내게 두신 이 어줍은 마음조차도 곧 영광의 소망이 되게 하심을 믿는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시 121:5-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