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잠언 5:2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고, 가슴으로는 뜨거운데 실제 삶으로 드러내기로는 어려운 것이 있다. 이처럼 혼자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발자취를 따라 살았던 이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한데 실전에 돌입하면 무엇을 알았고, 언제 뜨거웠는지 모를 정도로 해이해지는 경우를 본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가 그렇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 나 또한 여전하여서 기어이 신경안정제를 먹어야만 했다.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다.’는 말씀이 새삼 큰 위로가 된다. 어떠하든 내가 주 앞에 있다는 게 말이다. 옆 사무실이 공사를 시작되고 아침부터 어수선하였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려는데 사장이 건너와 죄송하다며 인사를 건넸다. 커피를 대접하느라 나란히 앉았다. 마침 전에 그 자리에서 무역업을 하던 다른 사장이 맡겨진 택배를 찾으러 왔다. 덕분에 저들과 같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변 이야기에서 정치 이야기로, 사업에 대해서 그러다 각자 이야기로… 두서없이 이어지던 말은 ‘저도 교회를 다닙니다.’ 하는 말로도 연결이 되었다.
전혀 몰랐는데 가족이 모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 교회의 세습과 어느 목사의 비리를 운운하며 그래서 마치 적당히 교회를 다니게 됐고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에 방점을 찍었다. 주거니 받거니 저들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문제 아니냐고 되물었다. 의외의 인물이 주께 향한 간절함이 있다는 데 놀랐다. 주거래은행이 같은 건물에 있어서 비록 지금은 안산으로 이사를 했지만 종종 이렇게 들러도 좋은지 물었다.
그렇구나! 다 나름의 관계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었다. 처남이 목사였다. 처와 두 딸애가 교회에 열심이었다. 뒤지지 않고 옆에 있던 이도 이모부가 목사이다. 처가 교회를 다니고 어머니도 신앙이 좋았다. 그런데 자신은 몇 번 사기를 당했는데 그게 다 목사여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거였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었다. 듣다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래서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저들에게 ‘결국은 하나님과 당신이 문제다.’ 하고 말했다.
오전이 후딱 지나갔다. 오후께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 다섯이 처음으로 글방에 왔다. 하필 옆 사무실 철거작업을 하는 날이어서 시끄럽고 복잡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맡겨두고 돌아가자 순간 훅, 하고 불안증이 몰려왔다. 오랜만에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이었고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순간 가슴이 조이고 식은땀이 나며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두려움에 옥죄었다. 그냥 돌려보내야 하나? 망설이다 안정제를 한 알 입에 넣었다. 여전히 나는 연약하였다.
저녁께 아내의 표정이 심각했다. 종합검진결과 산부인과 쪽에서 자궁에 혹이 암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직검사를 다시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하고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안정제를 먹지는 않았다. 딸애가 퇴근하여 오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의 선하신 뜻을 구하였다. 모처럼 어수선한 하루였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혼자 조용히 성전에 있을 때, 소리 내어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평안하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주만 원하시면 여기서 이대로 성경만 읽고, 좋아하는 위인의 신앙서적만 들썩거리면서, 가끔 찾아오는 이의 절절한 사연을 들으며 뭐라 이상적인 말로 거들고, 적당한 거리에서 아이의 슬픔을 위로하고, 전화상으로 위로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 정도의 만족함이면 족하였다. 나는 여기가 좋다. 이곳에 주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초막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 은둔이 됐든, 혼자 떨어져 뜬구름 잡은 일이 됐든,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어수선한 하루였다. 나를 실전으로 몰아넣으신다. 두려움을 직면하게 하시고 고통을 밀어놓으신다. 설마, 하고 있지만 아내의 건강이 걱정된다. ‘아니 그럼! 여기 교회는 어떻게 유지를 하십니까?’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의 설명은 궁색하였다. 그는 보란 듯이 ‘그래서 저에겐 먹고 사는 게 우선입니다.’ 하고 당당히 말하였다. ‘여기가 좋다.’는 나의 말이 저에게는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마 17:7).” 그리고 산 아래로 이끄신다. 만약 거기서 홀연히 영광중에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면 어찌 됐을까? 저마다 산 속에 암자를 짓고 은둔하여 살며 거룩을 이뤄가지 않았을까? 말씀은 실전이다. 나를 이끌어 현실에 두신다. 돈에 쩔쩔매고, 연약한 육체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토해지는 나의 죄성을 마주하고, 자식들 걱정에 교회 아이들 등살에 살 수가 없이 휘둘린다. 결국 긴 여행을 떠나는 아이에게 전화를 해서 공항에 앉혀 잠시 전화로나마 기도를 하고 노파심에 다시 또 당부를 하였다.
지지고 볶고,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게 하시는 게 하나님이셨다. 결코 변화산에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삶에서 최선을 다해라. 그럼 돕겠다. 하시는 게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거룩은 이루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일이다. 열심을 다해 도달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이내 드러나는 것이다. 곧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18).” 맡기신 한 날의 수고는 사명이었다.
아이 다섯 명 앞에서 순간 겁을 먹고 두려움에 파르르 떨어야 하는 정도의 나였다. 마치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댈 입장이 못 된다. 저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나의 고백이 저들에게 어찌 들렸을까? 아내가 암일까봐 두렵다. 내게 큰 병이 올까봐 무섭다.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늘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열심을 다하는 게 아니다. 어떤 조건처럼 이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하는 마음은 불신앙이다.
모든 게 그에게서 창조되었다(골 1:16). 오늘 잠언의 교훈도 그것이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평탄하게 하신다는 게 묵상의 깊이를 더한다. 단지 내가 바라고 구하는 의미에서의 평탄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아는 것이 내가 말하는 평탄은 언제나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일 때가 많다. 안일함으로 더해지고 나태함으로 이어져 끝내 하나님이 없이도 그럭저럭 살만한 정도의 것이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오늘 시편의 기도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여기에서의 평탄이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는, 평탄이란 ‘지면이 넓고 평평한 길이다.’ 곧 일이 되어가는 순조로움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함을 일컫는다. 이처럼 사전적인 의미만 돌아봐도 평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하는 일이 잘 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어떠하든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하늘가는 그 길이 고요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주를 눈을 들어 향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 절실함에 대하여 시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종은 상전의 처분만 기다린다. 여종은 여주인의 손만 바란다. 왠지 구차하고 서럽다고 느껴지면 여전히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지 못한 증거다. 마치 자신이 뭔가 대단한 자유인인 것처럼 구는 교만이 가득한 것이다. 실제 연봉 얼마 인상에 웃고 울고 하는 것 아닌가? 직장 상사의 눈치가 하나님보다 신경 쓰이고, 거래처와의 계약이 성사되는 게 그 어떤 일보다 기쁜 거 아닌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주인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한다. 마치 동등하게 아니 저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마치 탕자의 형 같이 굴 때가 많다. 최소한 내가 저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경우에는 아버지의 처서가 마땅치가 않다. 나에게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싶은 것이다. 나는 이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은혜를 바라지만 요구할 수 없다. 뭐 그리 당당할 수 있겠나! 예수의 보혈의 은총은 결코 나의 위업이 아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이 선물로 여겨지는 때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 생이 퍽퍽하고 어려울 때 은혜를 구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진다. 종이면 어떻고 거지면 어떤가?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5).” 이를 내 힘으로 어찌 해결해보려 할 때는 은혜도 달갑지 않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둥실 춤이라도 추겠다.
내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혹여 내가 이해를 다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이해하신다. 뭘 특별히 잘 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으로 원칙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소임인양 구는 자는 늘 억울한 것이다. 밀린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처럼 하나님을 찾아간다. ‘저도 압니다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남자는 커피를 마저 마시며 말했다. ‘그럼 이제 와서 어떡하라고요?’ 아이가 항변하듯 말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여기서 삽시다.’ 나는 말했다.
두려운 일이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여전히 뱀은 속살거린다. 이만하면 됐지 뭐? 교회 세습이 문제야! 목사가 사기꾼이 더 많아! 그냥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마치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게 가능한 것처럼 나를 휘감는다. 그러나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주의 권능이 아니라 주님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주 안에서 나의 연약함도 자랑이 된다. 이는 저가 나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심이었다.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천성을 향해 가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주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나에게도 그러하게 하심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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