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1-23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8
내가 자고 깰 때에 나를 보호하시고 나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등불이요 법이요 생명의 길 되시는 주 앞에 앉는다.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의 어려움은 별개다. 주님은 나의 이상한 기질과 괜한 염려를 없애주지 않으신다. 불편한 몸과 엉뚱한 마음도 그대로 두신다. 나를 개조해서 로봇처럼 관리하시려는 게 아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건 그 어떤 악조건도 선한 길로 인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신다. 악한데 악이 더는 악으로 치닫지 못한다. 미련한데 미련이 주를 멀리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악한 기질로 인해 더욱 선을 도모하고 미련함으로 더욱 지혜를 구하게 하신다.
모든 게 선을 향한다. 은혜를 토대로 바른 습관을 만들어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덕을 더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덕을 더함은 결단을 의미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결단은 여전히 그러고 있는 나의 미련함을 인식할 때다. 결단에는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의 근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나의 모순에는 절제를 더한다. 말씀을 전하는 나와 대치되는 나를 결단으로 이겨내려면 그럴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은 절제함으로 인내를 더한다. 하나님은 나의 그릇됨을 개조하시기보다 오래 참으심으로 돌이킬 때를 조성하신다. 내버려두심의 깊은 사랑이다. 인내에는 경건이다. 경건이란 무엇을 소중히 받들고자 하는 엄숙함이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인내로 경건을 더하는 덴 형제 우애가 필연이었다. 정과 사랑은 같이 한 시간과 비례한다. 늘 곁에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마음 졸이던, 사랑이란 같이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귀하다. 다 안다고 여기던 것에서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리고는 하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 내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 거룩하여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심으로 거룩을 사모하고 바람으로 예수를 닮기 원하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내 뜻을 이루어지게 하심이 아니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신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나는 어림없다. 그렇듯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죄가 나를 주장하려 하는 것처럼 그런 내 의지를 붙드시고 주의 소원을 행하게 하심이 값지다. 이처럼 새벽에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여러 근심과 걱정에서부터 소원하는 마음의 일들을 주 앞에 풀어두게 하신다. 혼자 양치를 하고 정돈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자라면서 그 필요를 느끼고 훈련함으로 혼자 옷을 입고 양치를 하고 어지러운 걸 정돈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습관이 된다.
거듭났다고 해서 훌륭한 습관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단을 했다는 건 이제부터 싸워할 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리모컨을 쥐고 우리를 조종하시는 분이 아니다. 여전한데, 도대체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럴 바엔 왜 기도를 할까? 전에는 알지 못했던 대처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주님의 소원을 내 안에 두시고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하신다. 옆 사무실에 공사가 시작되고 시끄러운 소음과 분진으로 짜증이 날 거였는데, 나는 대추차를 우려서 한 잔씩 돌렸다.
오전에 일찍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아침까지도 본문을 어디로 할까,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주일의 설교를 프롤로그로 하여 잠언을 차례대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아프고, 무엇 때문에 걱정이 앞서고, 이런저런 성가시고 불편한 게 여전하지만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게 된다는 게 때론 신기하였다. 다른 더 좋은 수를 강구하다가도 말씀 붙들고 묵묵히 주어진 현실에서 주를 바라는 게 상책이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늘어가는 기쁨이 기묘하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근심과 걱정이 떠나질 않고 어떤 어려움이 여전하지만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전에는 그것으로 더욱 세상을 향하고 친구를 필요로 하고 ‘남들처럼’ 사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이제는 그래서 더 주를 의지한다. 현실이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모든 게 새로운 것이다. 예수님의 기쁨도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 8:55).” 그러므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곧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것인데 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의 피를 덧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런 거였다. 이는 결코 인위적인 것도 아니고 억지로도 아니며 원칙에 따른 것도 아니고 원리를 내세울 일도 아니다. 막연하지만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순종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게 아니었다. 예수의 보혈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그러므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게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내 것이었다. 누굴 생각하며 마음 쓰는 게 저를 위한 게 아니라 날 위한 거였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나에게 향하신다. 날 위해 구주가 오셨고 보혈을 흘려주셨으며 날 위해 부활 승천하셨다. 이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이 사랑을 잘 아시는 성자 하나님의 실천이었으며 이로써 기쁨을 가눌 길 없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시고 함께 하심이었다. 날 위한 그 위함은 나의 값어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던 게 아니라 도저히 그럴 자격이 안 되는 나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무궁하신 거였다. 누가 나를 공격하고 저주하고 악하게 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나쁜 게 하나님 앞의 나였다. 그런 나를 사랑하신 증거로 사람이 되셨고 대신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지금은 때로 막연하지만 곧 드러날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주의 성도는 확실히 알 것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13:12).”
이게 맞나? 싶다가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 여전히 내게 필요한 건 주를 신뢰하는 것이다. 매순간 결단으로 다짐한다. 이로써 덕을 세우는 일이다. 망설임은 두 마음이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그러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6-7).” 늘 내 안에 밀고 들어오는 것이 의심이다. 이 길이 맞나? 이러고 있는 게 맞나? 다른 더 좋은 수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때 성경은 다시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억지로 엉덩이를 걷어차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참고 기다리신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자칫 행함을 너무 강조하느라 상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행함보다 상태다. 내가 사탄과 싸우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갑주를 입을 뿐이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사탄을 내가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주가 하시게 나를 놓아드릴 뿐이다. 영적인 전쟁이란 담대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이를 위하여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그럼 다 됐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나를 든든히 받치고, 의의 호심경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복음이 나를 인도하고, 믿음의 방패가 공격을 막아내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할 것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유난히 일찍 깨우시는 터에 자주 글쓰기를 멈추고 그 의미를 새김질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그러므로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4).” 곧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들을지어다 (0) | 2017.01.08 |
---|---|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0) | 2017.01.07 |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0) | 2017.01.05 |
지혜를 버리지 말라 (0) | 2017.01.04 |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0) | 201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