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전봉석 2017. 1. 7. 07:17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7:3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하는 일에 늘 말씀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 귀하다. 이를 마음에 새겨 생각의 모든 흐름이 지나게 하는 것이 소중하다. 말씀을 손가락에 매고 마음판에 새긴다는 것은 항상 실제이고 실전이기를 당부하는 일이다. 전혀 상관없이 살다가 문득 말씀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다. 바쁜 일을 우선하고 나중에 틈이 날 때 한가해지면 보는 게 아니다. 손가락은 모든 일에 소용된다. 모든 일에 말씀을 적용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마음은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무소부재하다. 어디에나 다 있고 무얼 하면서도 같이한다. 지금도 손은 글을 쓰지만 마음은 다른 델 휘젓기도 한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 있어 매순간 나의 전부와 함께 하라는 것이다.

 

호세아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하는 말씀이 뚜렷했다(호 4:14). 이내 그것으로 부끄러움을 당한다(19). 우리의 죄성도 어지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도 어지간하시다. 그처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그러기까지 주님은 참고 또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3).”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 숙연한 마음으로 읽다, 문득 딸애 생각을 하였다. 만나고 있는 남자 애를 다음 주 월요일에 데려오라고 하였다. 누구 사귄다는 말을 듣고 3년은 지켜보자고 했던 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 당장 하나님이 어찌하려는가 모르겠으나 더는 만나는 것조차 미루는 게 본이 아닐 것 같았다. 불쑥 그런 마음을 주신 데도 놀라웠다. 왕래하며 좀 더 두고 보자.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말씀을 읽다, 것도 암울한 시대에 생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지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주신 마음이었다. 마음이 어렵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다 옆 사무실 사장과 마주쳤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냥 보내시라 하였다. 우선 그 집 아이가 기술학교에 가는 줄 알았는데 인문계로 가게 됐다고 했다. 종일 게임만 하고 집에 있다는 말에 내가 다시 연락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탈북 여성이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관심이 있다면 글짓기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무료로 하겠다고 하자 좋아라 했다. 명함을 잔뜩 건네고, 하나님이 무슨 생각이신가? 생각하였다.

 

아이가 와서 성경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고 당구를 쳤다. 2월에 군 입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가라사대>를 한 권 다 끝낼 수 있어 기특하였다. 꾸준함이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덕목이다. 오후께 쌍둥이 아이가 둘 다 인문계를 갈 수 있게 되어 축하하였다. 이제는 제법 눈도 마주치고 씨익, 웃어주기도 하여 기뻤다. 얼레고 달래고 아이를 주의 사랑으로 품는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일이다. 본래의 나라면 바른 소릴 해대고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건데,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글방이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는 데는 여간 엉거주춤한 게 아니다. 은근히 수입을 먼저 생각하게 돼 있고 영리를 목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 고개를 든다. 양손에 쥐고 이럴 땐 글방으로 이럴 땐 교회로 내세우려니 덕분에 어려웠다. 물론 글방이 교회다, 하고 내세우곤 했지만 때론 정직하지 못하였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그러자니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한다. 갈아 일구어 새로운 논밭을 만들어야 한다. 수입을 염두에 두려니까 그게 늘 걸림돌이긴 하였다. ‘지금은 여호와의 때니’ 주가 하신다. 우겨봐야 소용없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다. 이젠 망해도 교회가 망하는 것이다 생각하니 홀가분하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사나 죽으나… 내가 어떻게 안간힘을 쓴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서서히 흐르는 뭔가가 있다. 졸졸졸 시끄럽고 요란하던 것은 내 믿음이 얕아서였다. 그러는 동안 쓸려가고 패인 곳에 주님의 마음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상관없을 때 가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진노를 압도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파괴되었던 한 평원의 도시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주의 백성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랑의 극치 긍휼하심 때문이다. 긍휼은 ‘함께 고통 받다’의 의미로 ‘하나님의 자궁’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긍휼하여서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러하심으로 나도 그러하였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결연한 의지 때문도 아니고 다잡은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주께서 그러하심으로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할 수 있었다. 행여 나의 수고가 아니었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 다른 무기가 내게는 없다.

 

때론 내키지 않고 더러는 근심이 먼저 앞서는 일이지만, 유유히 그리 흘러가는 도도한 여정을 느낄 수 있다. 깊은 물은 티가 나지 않는다. 흐리멍덩한 거 같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고, 딱히 어떤 특별한 색깔도 없는 것 같다. 베드로가 제시하는 믿음의 덕목들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어느 것 하나 별개일 수 없다. 하나가 없으면 전부가 없는 것과 같다. 한데 전부가 있으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위에 색깔을 입힌 팽이를 연상하면 쉽다. 잘 돌 땐 따로 색깔이 없어 보인다. 휘청거릴 때 한 색이 또렷하다가 돌기를 멈출 때 각각의 색깔이 돌출된다.

 

예수님은 전부였지만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다. 바울이 사울일 때 저는 각각의 특징이 도드라져 주님을 공격하였다. 그게 저의 양심이었다. 거리낄 게 없었다. 믿음이 믿음으로만 있을 때 신념이 되고 아집이 된다. 덕이 덕으로만 있을 때 우유부단하며 방관자가 된다. 지식이 지식으로 있을 때 지적 허영은 어떤 교만보다 두텁다. 절제가 절제로만 있을 때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앉는다. 인내가 인내로만 있을 때 억지 사랑으로 완고해진다. 경건이 경건으로만 있을 때 편을 가르고, 형제 우애가 형제 우애로만 있을 때 조직이 우선이 된다. 사랑이 사랑으로만 있을 때는 이내 자기만족에 겨운 집착일 뿐이다.

 

믿음의 팽이는 안정감 있게 돌면서 모든 덕목은 그리스도로 하나가 된다. 개개의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목사가 카리스마가 있다. 그 교회는 뚜렷한 색깔이 있다. 누구는 어느 덕목에서 우월하고 어떨 땐 무슨 바탕이 도드라진다. 하는 이 모두는 아직 회전이 붙지 않아서 불안정 할 때이거나 서서히 그 균형을 잃어가는 때일 수 있다. 충만함이란 아무 것도 아닌 듯 ‘그저 하나님’ 뿐이다. 기승전, 하나님이다. 거룩을 의식하지 않는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 내 수고와 노력이 이루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종종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을 비유로 드셨다. 저들의 특징은 아무리 척박하고 모질다 해도 그 처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다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원칙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도리와 이치를 운운하지 않는다. 그곳에 두신 이에게 찬송하는 모든 자연의 법칙이 순응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혐오스러울 때가 말도 안 되는 원칙과 교리를 운운하며 누구를 판단하는 일이다. 더욱이 나를 옥죄는 걸 무슨 대단한 경건쯤으로 여길 때다. 성경을 하루에 몇 장 읽었고, 기도를 몇 시간 했으며, 하루 중에 몇 시간을 주와 동행하였는지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혐오스럽다.

 

선을 이루어간다고 여기는 마음에서는 어림없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여실히 느끼며 그래서 더 주밖에 없음을 처절히 느끼는 게 성도였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로 하게 하시는 거였다. 그 흐름에 놓아두는 일, 회전에 맞추어 돌려고 할 때 회전은 무너진다. 무뎌진 회전에서 도드라지는 덕목은 자랑이 되고 자기 의가 되기 십상이다. 후세가 이를 기억하고 닮으려는 데는 본이 되지만 스스로 내세워서는 꼴불견일 뿐이다.

 

요즘은 뭐 그렇게 대놓고 기도를 하고 교인입네 자기 입으로 운운하는지 민망하기만 하다. 어느 변호인은 재판정에서 기도를 하고 대통령을 예수로 비유하였다. 누군 당당히 하나님 앞에서 거리낄게 없다고 자신하였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이 정도는 했네, 하는 어느 목사의 항변은 끔찍하다. 내 안에 꼬물거리는 억울함도 다를 게 없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싶은 자기 분함은 회전을 멈춘 팽이일 뿐이다. 신앙은 신조가 되고 믿음은 신념이 되어 스스로 하나님이다. 나보다 착하게 산 사람 있으면 다 나오라 그래! 하는 아우성이다. 참으로 가관이다.

 

고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설령 다른 이보다 믿음이 좋고 덕이 있으며 지식이 있고 절제를 잘 하고 인내가 있어 형제우애가 남달라 사랑이 처벌처벌하다 해도,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런! 그러므로 주 앞에 송구할 따름이다. 이에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자. 이 말씀을 손가락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