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잠언 8: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성경은 참고 기다리신다(호 14:2).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9).” 그 길에 걸려 넘어지기를 숱하게 하면서도 그게 그러니까, 불가능하였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믿음을 구할 수 없다. 자의로 신앙을 더해 주를 만날 수 없다.
아이는 병원을 옮겨 좀 더 심해진 자신의 상황에 맞춰 처방을 받았다고 했다. 일부러 일주일 동안 연락도 안 하고 그냥 두었더랬다. 그래, 주일에 보자. 했더니 녀석은 대뜸 봐서요, 한다. 이게 아직 멀었다. 살만한 게다. 분당에서 오기가 너무 멀면 거기 가까운 교회에 가라. 어디 무슨 교회도 있다. 나의 설명은 풀풀 먼지만 날리는 듯했다. 약속이 있는데, 봐서 어쩌고 하면서 아이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약을 먹으니까 좀 살겠나보구나? 나의 안타까움에 비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일까, 답답함이 밀려왔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남김없이 다 잃은 뒤에야 돌아서는 게 사람의 특징일까? 뭐라 길게 설명한들 기운만 빠져서 알아서 해라, 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죄의 집요함이 끈질길수록 은혜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밥과 김치를 가져와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성경공부를 하였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새삼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오후에 사장이 건너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갔다. 보니 저쪽 외가가 그 자제분을 모두 목회자로 세운 것이 신기하였다. 우리 형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에 비해 본인은 뚱하니 원리와 법칙을 운운하며 제사를 모시는 일에 있어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교회를 싫어하는 이유를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 악독은 굳어진 마음이다. 독살스러움을 자신만 모른다. 마음이 흉악함에 대하여 자신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함은 마땅치 않은 기분으로 성이 난 것이다. 자기 기준을 들어 이에 마땅치 않은 기분이다. 그래서 분이 난다. 분냄은 너 때문이다. 난 잘할 수 있는데 꼭 너 때문에, 이 제도 때문에, 저들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언제든 총구를 당기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하여 떠들고 비방한다. 항상 입이 열려서 자기를 두둔하고 변명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몰라준다. 그런 저들이 야속하다. 흉과 허물만 보인다.
이와 같은 마음이 성령으로 하여금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늘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몰라주니 답답하고, 변명하느라 상대를 비방한다. 분이 올라오고 서러움이 쌓여 화가 나간다. 걸리기만 해봐! 벼르고 있는 마음에는 성령을 모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이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실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화인 맞은 양심이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왜곡된 마음을 두둔하는 일을 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거짓말을 거짓말로 여기지 않는다. 한두 번은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게 왜 나쁜지 알지 못한다. 아니 늘 나름은 선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니 뭐라 한들! 남김없이 거덜을 내고야 만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남자가 이런저런 말을 하다 결국은 자기 자랑으로 빠질 때면 알겠다. 인정받지 못하는 자의 자기 애착이다. 아이의 떠벌림이 내 것과 닮아 있어서 안쓰러웠다. 그렇게 나도 태연했고 낙천적이란 소릴 들었으며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다 잘 될 거라 여겼었다. 그것을 내가 어찌 설명하여 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저 앞에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러셨구나, 그렇구나, 하며 속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도 줄 게 없다. 나사렛 예수 이름 말고는 내보일 게 없다.
근사한 성공도 없고 적당한 잘됨도 없어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무엇으로 내보일까? 그저 다만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손을 내밀고 그런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저들 앞에 더욱 의연할 수 있기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씻음을 받은 것이지 씻은 게 아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신 이가 저들 또한 강권하시기를.
그러느라 생겨난 민감한 양심이 감사하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감사는 적극적인 참여다. 힘씀이다. 그저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내가 속한 자리다. 그러기 위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분별하는 애씀이 요구된다. 말씀을 끌어당기면서 쓸데없는 오락을 멀리하게 된다. 온전하신 뜻을 사모하면 ‘도깨비 같은 방송’에 빠져들지 않는다. 유치하고 처량한 것이다.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다. 가소로울 뿐이다.
나의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그러하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2-14).”
다른 수고와 애씀으로가 아니라 말씀이 내게 가까울 때 이를 행할 수 있다. 딸애가 곁에서, 아침에 피곤해서 집중이 돼? 하고 뭐라 물었다. 나는 하루 중에 이 시간이 제일 귀하다. 좋다. 좋다, 정도로 어찌 표현이 가능할까? 이 시간을 위해 일찍 잔다. 전날에 책을 읽고, 누굴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으로 지내는지, 그 모두를 이 시간에 펼쳐두고 살피게 된다. ‘오직 그 말씀이 내게 매우 가까워서 내 입에 있으며 내 마음에 있은즉 내가 이를 행할 수 있다.’
아내는 성경공부를 하다말고 그러고 보니 자꾸 내려놓게 돼, 하고 고백하였다. 기이한 도우심을 알아가는 것이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대하 26:15).” 우리가 무슨 재주로 교회를 일궈갈까? 저 한 영혼을 대체 무엇으로 이끌 것이며, 찾아와 퉁명스럽게 말하는 이의 마음을 어떻게 설득하고 돌이켜 주 앞에 세울 것인가?
기이한 도우심이 아니고는 아무리 새로운 무기를 고안해도 무슨 소용이 있담! 저들 눈에는 당최 너는 뭘 먹고 사니? 하고 궁금하기도 하겠다. 늘 근심과 걱정이 떠나질 않지만 그래서 주를 의지하고 있으면 또 그때마다 도우심을 더하신다는 걸, 아내는 고백하였다. 모든 이야기 끝에 돈을 염두에 두는 세상에서 온전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시 86:10).”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그러므로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잠 8:6).” 말씀의 말씀이다. 고로 오늘이 어렵다 해도, 때론 눈물로 씨를 뿌린다 해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말씀의 말씀이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곧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주의 약속하신 말씀 붙들고 간다. 내가 붙들었다 여겼는데 말씀의 생명이 나를 붙드셨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4-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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