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 9:1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늘 늦는 사람이 늦고 미루던 마음이 미루고 설마 하는 태도로 설마 한다. 왜냐하면 자주 늦는 데는 싫은 마음이 섞인 것이고, 늘 미루는 것은 다른 기대가 있는 것이며, 설마 하는 마음은 안이함이 주는 무력감이다. 이 모두는 거만함에서 온다. 그래서 저에게 뭐라 한들 감정만 상하지 돌이키지 못한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를 경외하는 마음이 은혜이다. 우리의 지혜는 선한 것, 아름다운 약속, 무궁한 은혜를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자각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9).” 결국 여러 핑계로 무장한 경우는 뭐라 한들 소용이 없다. 오늘 잠언은 이를 인정하게 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왜 어리석을까?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8).” 이를 끔찍하다고 여기면 지혜로운 자이고 그럼에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이다. 죽은 자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저의 객들이 깊은 지옥에 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사는 게 지옥이다. 감추고 숨기고 시치미 떼는 동안에는 오히려 스올을 선호한다.
그렇겠구나! 일련의 어지러운 사회가 근거가 되어 이해를 돕는다. 자기주장을 위해 섬기는 신(神)을 우롱하는 것은 다반사다. 스님이 분신을 했다. 집사가 목사를 조롱하고 목사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자기 의견을 뒷받침한다.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모른다 하고, 의심은 증거를 남긴다. 지옥에는 괴물이 없다. 학식이 많고 사회적으로 저명하며 나름 일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득시글거린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처럼, ‘모두가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죽은 이와 함께 있고 그의 객이 스올에 있음을 어리석은 자만 알지 못한다. 오늘 시편은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들려주신다.
결국 주가 세우시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내 수고와 애씀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위로가 아니라 책망이다. 환희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기쁨이 아니라 죄책이다. 주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은 잔인하다.
그 사랑은 자격이나 어떤 기준에 있지 않다. 그럴 수 없는, 전혀 가치가 없는 데서 주의 사랑은 확증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이 기쁘실 때 나는 불편하다. 사람 앞에 보이려고 우리의 기쁨은 위선되다. 바리새인은 지옥에서도 거룩을 가장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자기의 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중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다.
저절로 생겨나는 경지의 것은 잠깐씩 불완전하게 느낄 뿐이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살 수 없다. 그러기 위해 부르신 게 아니었다. 기도를 통해 황홀한 충만을 경험할 수 있지만 돌아서기 무섭게 비애가 원통함이 도사리고 있다. 찬송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멜로디가 주는 들뜬 감정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지옥이다. 이 또한 감사한 것은 주가 세우지 않으시면 모든 경성함이 헛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내 기쁨이 아니라 주의 기쁨이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 설교를 하면서 설교 말씀이 은혜로 여겨졌다. 유치하게 표현하면, 나의 목소리도 강단 있는 흐름도 이어져 다름 내용으로 전개되는 과정도 모두 내 것이 아니게 여겨졌다. 다른 주일과 달리 다른 사무실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의식이 되기보다 더 또렷하게 전하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늘 미진하고 어설프고 뭔가 아쉬움이 컸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 처음 느끼는 경험 같았다.
주의 기쁨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불편해 하는 나와 그것으로 드러나는 나의 다툼이 작렬할 때 비로소 ‘추수 때에 얼음냉수’ 같다. 내가 나로 기쁜 게 아니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주인의 마음이 시원할 때 나의 마음도 시원하였다. 글쎄. 어제는 어째서 그러했나? 나는 모른다. 교회가 교회답기를, 우리가 성도답기를,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별 볼일 없고 하찮기까지 한 곳이지만 주가 세우셨음을 확신하는 데는 내 안에 두시는 만족함이 증거가 된다.
저 아이가 왜 오나? 싶은데 오는 것이고, 어떻게 유지하나 싶은데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업종이 들어서고 뜯었다 붙였다 난리도 아닌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온함을 주신다. 주인 남자는 그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대체 뭘로 충당하나, 싶은. 이래서야 월세라도 벌이가 되나, 싶은. 그런데 신기한 건 우리 교회만 월세도 관리비도 제때 내고 있었다. 앞 사무실은 보증금 천오백을 다 까먹고 나간 모양이었다. 옆 사무실도 세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일 헌금을 정리하다 보면 은총은 더욱 확실해진다. 천 원, 삼천 원, 혹은 빈 봉투일 뿐인데 그 나머지를 주께서 채우시고 일구시는 거였다.
주께서 세우지 않으시면 모든 경영이 헛되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살갗으로 느껴진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아무리 용써봐야 소용없다. 주가 세우지 않고 지키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헛되다. 고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그러게, 나는 잠이 참 달다.
오늘은 딸애가 만나고 있는 남자 애가 온다. 아내도 그렇고 다들 긴장한 모양인데, 나는 별 거 없다. 주님이 만나게 하신 거면 만나게 하실 것이고 그게 아니면 또한 이유가 있으시겠다. 탐탁지 않고 뭔가 아쉬움이 있는 거야 별 수 없는 노릇이고, 모르겠다. 굳이 내가 알아야 할 게 아니라면 어렵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사랑을 옆에서 같이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하심을 믿는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인가? 그 관계가 바르고 온전한가? 궁금해졌다. 주가 하신다. 하실 것이고 하셔야 한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깊이 다가오는 이유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헛다리짚고 넘어졌던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딸애가 좋다고 하고 그 좋다는 게 ‘함께 주를 바랄 수 있어서’라고 하니, 그거면 됐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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