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잠언 13:13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1-2
주체할 수 없는 아이들로 넘쳐난다. 아래층 아이엄마는 기어이 실력행사(?)를 하였다. 모든 학원을 끊고 핸드폰도 뺏고 TV 리모컨도 숨기고 일명 ‘니 맘대로 해’를 감행하였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삐죽거리다 아이가 올라와서 아내에게 안겨 울었다. 저쪽 큰 애는 기어이 수능시험도 보지 않고 주구장창 게임만 하고 있다고 했다. 약사 조카아이는 불안증이 심해져서 기껏 취업했던 데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여 집에 있단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자신을 간수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에 잠언은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13:24).” 그 원인을 밝혀준다. 저마다 매를 드는 게 무슨 사악한 일이나 되는 듯 위세를 떨며 교양을 부린다. 들어보면 일관성이 없고 자기감정에 휘둘려 신경질을 내면서, 매를 들지 않았다는 데 뭔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한다는 건 근실함이 우선돼야 하는 것을 말씀은 이른다. 곧 부모 스스로 부지런하고 진실해야 한다. 이는 자신을 위한 우선이고 다음이 근실함으로 징계하는 것이다. 어리다는 건 자기고집을 못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아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저마다 자기고집에 겨워 쩔쩔맨다.
그 근본적인 데는 ‘말씀을 멸시하는’ 경우다. 말씀을 중히 여긴다는 건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한데 말씀은 항상 뒷전이다. 실제와 이론은 다르다는 논리를 편다. 좋은 말씀은 듣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좋겠다, 하는 정도지 현실로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놓고는 어디 용한 교회(?)를 찾는다. 능력 있는(?) 목사를 선별하고 푸닥거리하듯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안도한다. 말씀이 무너지면 전부를 잃는 게 된다. 이런 자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13).
오후가 돼서 아이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지내는 동안에도 한 번 전화를 않던 이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정신병동에 입원수속을 했다며 울먹였다. 통화 중에 녀석이 전화를 해서 먼저 통화를 했다.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간 것에 잘했다고 하였다. 죽을 놈이 아니었다. 아이엄마에게도 그리 말해주었다. 그런데 언니가 사는 동네 어느 교회에 그런 데 능한 목사가 있다며 애를 데려가 보라고 했단다. 아니면 굿이라도 하지 왜 애를 정신병원에 넣느냐고 뭐라 하더란다. 굿과 목사가 같이 쓰여서 놀랐다.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구나, 싶었다. 대학 들어가면서 열심을 다하는, 딸애 다니는 교회에 나갈 생각이라고 하였다.
기묘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에 대해, 가정에 대해 이야기가 길어졌고 나는 저를 위로 하며 내가 아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러므로 어느 능력 있는 목사도 또는 용하다는 굿판도 옳은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를 통해 그 가정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큰 그림이 있음을 설명해주었다. 이를 어찌 말로다 이해시킬 수 있을까? 단지 어떤 여자애를 사귀다 그리 된 게 아니라는 것,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누적돼 온 아이의 자격지심과 열패감과 기형적인 소원이 그 하찮은 일(?)에 맥없이 무너진 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다행이다. 더 어른이 되는 동안 굳건하게 잘 견딘다고 견딘 게 자녀에게 쏟아내고 그 분풀이로 지독히 무심하거나 폭언을 일삼는 부모가 됐을 거였다.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이 멸망하는 자리에까지 들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주께 나아갈까? 어떤 걸 좋아하실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7).”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이기 위해 오늘 이처럼 특별히 환경을 조성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보일 것은 겸손이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기가 막히다. 아침에 소리 내어 읽은 구절의 말씀이 이처럼 접목되어 이해가 된다. 은연중에 아이엄마에게도 그리 설명할 수 있었다.
아이 때문에 겁을 먹고 당장 새벽예배라도 나가겠다는 말에 그리하시라 했다. 그런 마음이 샤머니즘적인 것이라 해도 그 또한 그 마음에 길을 내는 일일 거였다. 애한테 어느 교회, 또는 용한 목사를 강조하니 아이가 하는 말이 자신은 글방교회로 간다는 거였다. 그제야 아이엄마는 글방선생이 목사가 됐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안중에도 없던 사람이, 관심에도 없던 하나님이 졸지에 필요하게 됐다. 여기서 그저 필요에 의한 것으로 그친다면 신명나게 굿판을 벌인 것과 다를 게 뭐 있나?
주께서 부르신다. 이 모두를 정하신 이가 여호와시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9).” 그리하여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7:5).” 우린 얼마나 허튼 데 기대어 위로를 삼고 살았던가? 사마리아가 아니었나? 예루살렘으로 안위하지 않았던가? 어느 용한 목사를 필요로 하고 어느 교회에 뭐가 유명하다는 식으로 쓸려 다닌다.
아, 이런!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6).” 서로의 반목과 불신이었다. 그러니 해결방법은 하나뿐이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7).” 내가 건네줄 말이 이것뿐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8).”
화있을진저, 말씀의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귀가 값지었다. 얼마나 더 먹고 사는 데 열을 올리며 부자가 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을 것인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이를 위하여 얼마든지 양심을 버리고 거짓을 일삼으며 이를 더욱 든든히 하고자 악을 도모하려는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그러자니 얼마나 하나님 없는 자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래놓고는 스스로 옳다 한다. ‘쓰담쓰담’ 스스로 귀하다고 여긴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이를 부끄러워하는 우리 안의 경고음을 무시하느라 술에 취하고 자아도취에 빠진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우리의 믿음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지 막연한 환상이나 몽환적인 꿈을 꾸는 게 아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감각은 믿음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말씀의 실체를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도 기도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셨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나는 아이엄마에게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고는 전화로나마 같이 기도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시 아이가 전화를 주었고, 기도하자고 했더니 중심상가에 있어서 안 된다고 하였다.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는 하나님께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관심도 그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하던 걸 멈춰야 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야한다. 의지적인 관여다. 억지로라도 그리할 때 어느 순간 행동을 마음을 나의 온 중심을 기울이게 된다. 기도는 외부상황을 바꾸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람을 바꾸게 한다. 어느새 나의 성향이 바뀌고 관점과 기준이 그리스도의 것을 닮는다.
처음엔 죽겠어서, 엎친 데 덮친 환경으로 쩔쩔매다 이를 바꿔달라고 기도한다. 그게 목적인데 하나님은 꿈쩍도 않으신다.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위기가 온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그러면서도 하는 게 기도다. 처음부터 우린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른 자가 될 수 없다. 투덜거리고 다급하게 내 요구만으로 울부짖다보면, 내 안에 그처럼 많은 울분이 있었다는 데 놀란다. 추하고 수치스럽다. 부끄러움이 또 한 번 갈등하게 만든다.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당장 오늘부터 새벽예배를 나가겠다고 한 아이엄마를 생각한다. 그의 첫걸음을 응원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그동안의 완강했던 죄의 두께와 비례할 뿐이다. 뜬금없이 내게 전화를 하고,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교회를 나가겠다고 하는 걸 보고 그 마음의 다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직장을 그만둘까 한다는 소릴 해서 그러지 마시라 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상은 소중하다. 아이 핑계로 직장까지 그만둔다면 분명히 그것은 자기 의가 되어 ‘내가 이만큼 애썼다’는 위안으로 그칠 게 뻔하다. 더욱이 아이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
기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내가 알던 하나님은 여느 잡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비는 정도의 자기만족이었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죽겠으니까 비명도 터져 나온다. 살려주세요, 할 수 있는 게 복이다. 기어이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정도로의 기도는 하나마나다. 기도는 오직 예수뿐이라는 걸 일깨운다. 궁극적인 목표는 주께 집중하게 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기도의 절정은 하나님만 구한다.
오늘 시편의 기도는 그러므로 감미롭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자면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 감당도 못할 놀라운 일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평온하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리하여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1-2).”
‘젖 뗀 아이’다. 갓난아이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 품에 안긴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의지에 따라 그 품에서 평온을 얻는 것이다.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묵상할 수 있는 경이로움은 바로 그, 나의 의지를 주께 의탁하는 것에 놀랍다. 젖 뗀 아이처럼 그것이 얼마나 평온하고 안온한 축복인지를 아는 것이다. 부디 아이와 아이엄마에게, 나아가 주변에 아이들로 주체하지 못하고 악으로 깡으로 부모노릇을 하는 이들에게. 더불어 영혼이 병들어가는 아이들에게 오늘 시편의 감미로운 찬송이 들려지기를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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