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언 12:25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3-5
의지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 악하다.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미 1:5).” 한데 이를 뿌리치기가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없어 보인다. 종교적으로의 사마리아와 산당으로써의 예루살렘이 선하지 못하다. 가장 두려운 일은 ‘그 때에’ 일어난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3:4).”
여느 날과 같이 일찍 글방으로 갔다. 혼잡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여자아이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숙하고 성인 여자라고 하기에는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깍지를 끼는데 순간, 아픈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너 층을 더 올라간 후에 다른 쪽 구석에 섰던 늙은 여인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내리라고 하였다. 여자아이는 꾸뻑 눈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주가 함께 하시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여야 했다.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낮에 초등부 수업을 해야 하는데 불안이 밀려와서 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왁자한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공사 중인 소음이 뒤섞여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약을 먹고 억지로라도 수업을 마저 했다. 녀석은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술을 먹고 목을 맸다가 줄이 끊어져 쓰러져 있는데, 외삼촌에게 발각이 돼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장난처럼 지껄여댔다. 당장 입원을 하라 했더니 이번 주는 즐겨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썅! 지금 장난하나 싶은 것이 욕지기가 목구멍에 걸렸다.
술 먹기로 한 친구가 왔다며 끊겠다는 걸, 기도하자!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냉큼 끊지는 않았고 나는 붙들고 길게 주 앞에 아뢰었다. 통화가 끝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돌아누웠다가 다행히 잠이 들었는가, 싶은데 열두 시가 다 돼 같이 글쓰기를 했던 여자아이가 전화를 했다. 늦은 귀갓길인 듯 전철소음이 크게 들렸다. 녀석이 얘에게 전화를 해서 너스레를 떤 모양이었다. 겁을 잔뜩 먹고는 어떡하면 좋은지 물었다. 그러게, 나름 살려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데….
녀석 이야기는 차치하고, 아놔. 얘는 또 어쩌면 좋으나? 두세 달이 멀다하고 사귀는 남자애를 바꾸고, 그때마다 성관계가 따르고, 돌아오는 건 늘 환멸뿐이라 다시 또 남자를 새로 사귀는 형국이었다. 그러니 얘를 또 어쩌면 좋나? 스물둘, 올해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할 것인데 그게 또 그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는데 겁이 났다. 너가 더 큰일이구나!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이의 질문이 딱히 간절한 건 아니었는데, 딱 끊어! 뭐가 어쩌고 스스로 변명하지 말고 무조건 그만둬. 그리고 네 몰골을 봐!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나는 그렇게밖에 말해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여호와증인으로 살아온 조모와 그 등살에 하나님에 대한 환멸을 갖고 있는 부모와 덩달아 내가 믿는 하나님과 저들 가족의 하나님이 같다고 여기는 아이에게, 뭐라 한들…! 언제 한 번 오겠다는 말에 그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이 달아나서 밤새 뒤척여야 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말도 안 되는 오늘 말씀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래서다. 선한 말과 근심의 상관관계를 묵상해야 할 것 같다. 사람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어찌 근심이 없을 수 있을까? 저 아이들이 부모와 가지고 있는 그 유년의 모진 외로움을 잘 안다. 그렇다고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만큼 자신도 부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았던 건 분명한 일이다. 근심은 터무니없는 애착에서 온다. 과한 친밀은 억압이다. ‘너를 위해서’ 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은 폭력이었다.
근심은 두 가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게 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성도의 길을 가게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오는 근심이 허다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로써 자기를 찌를 뿐이다.
좌우지간 근심이 마음에 있으면 번뇌하게 한다. 공통적으로 두렵고 분하고 변증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그것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다른 건 탐함으로 미혹을 받을 뿐이다. 이때 ‘선한 말’은 근심을 즐겁게 한다. 나는 이 선한 말을 뒤이어 살피는 시편에서 답을 찾는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3-5).”
어떤 상황이던가? ‘깊은 곳에서’ 근심하던 때이다. 아픈 아이들이다. 우린 모두 아프다. 좀 민망한 기도지만 차라리 녀석이 더 많이 아팠으면 하고 바랐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게 몸이다. 어디가 부러져 고통에 신음을 좀 해야 헛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혼자 씩씩거리고 있자 아내가 걱정 어린 마음으로 물었을 때, 다리몽둥이가 부러져야 해! 나는 고약하게 그리 말하였다. 얘도 그렇다. 적당히 잘 사는 부모와 저들의 많이 배운 학력이 딸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 모친의 거짓 숭배로 어릴 때부터 시달려온 애 아빠는, 내가 목사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두 아이를 더이상 글방에 다니지 못하게 했을 정도다. 이해는 하지만 안 됐다. 저들의 어마어마한 학력이 자기 영혼을 굳어지게도 했다.
아픈 사람들. ‘모두가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그날>을 떠올려본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모두 멀쩡한 것 같지만 아파서 아우성이다. 그래서 술을 찾고 섹스를 하고 자신의 영혼을 헐값에 넘기고 점점 싸구려가 되면서도 도도한 척 군다.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혹은 여기저기에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고 거짓말을 외쳐대도, ‘깊은 곳에서’는 근심뿐이다. 아닌 척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드는 수렁 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의 풀 죽은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주께 부르짖는 수밖에.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아이에게 이와 같은 설명을 하면, 어릴 때부터 들었던 할머니의 여호와를 떠올리며 ‘그게 그거’라고 여길 텐데. 한참 어렵게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에 두 번 떨어졌을 때, 아이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었다. 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 나도 안다. 녀석은 객쩍은 떠벌임과 마치 죽겠다는 소릴 무기로 하여 관심 받고 싶은 것이다. ‘여기 늑대가 나타났어요!’ 처음엔 장난이었던 게 어느덧 실제가 되었다. 정작 늑대가 나타난 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죄다. 죄 때문이다. 한사코 부인해도 죄로 인한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설 수 없으니 숨고, 숨어서 느끼는 게 모멸과 수치뿐이니까 자기 수단을 강구한다. 일시적인 것으로 부끄러움을 감춘들 금세 말라 다시 또 새로운 잎을 뜯어다 가릴 뿐이다. 그럼 좀 나은 것 같은, 그 고단함이 오죽할까? 선생님이 점점 더할 거라 그러셨잖아요? 진짜 그런 거 같아요. (멈출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바랄 것은 무언가?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가인아 어찌 됨이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6).” 하갈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 무슨 일이냐?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창 16:18, 21:17).”
주께서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에게 그러지 마라, 그러는 거 아니다, 이야기하면서도 내 말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주 앞에 설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저 애들을 저들보다 더 사랑하시는 이가 돌보실 것을.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나는 주의 말씀을 바랄 뿐이다. 그 간절함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그러므로 바랄지어다. 주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속량하심을. 그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리라.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7-8).” 나는 그저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다 다시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하찮은 위인이지만, 아담아! 가인아! 하갈아! 부르시고 찾아오시는 주의 긍휼하심을 기다린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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