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잠언 14:10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3-14
사는 데 따른 우리의 수단이 허망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 1:11).”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자는 화있을진저,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9).” 기어이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응답한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11).” 이내 여호와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기까지,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4).”
아이엄마에게 문자를 하여 기도한다, 힘내시라 하였다. 전날에 울먹이던 목소리가 마음에 밟혀서였다. 달리 더 좋은 위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개입이 선명한데 이를 주목하고 기다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럼에도 자기 힘을 신으로 믿는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나님께 나는 특별한 존재다,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착각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그릇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2).” 이는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어떻게 일을 진행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1).” 비록 더딜지라도 참고 기다릴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3).”
시간 단위를 평형으로 놓고 생각하니까 까마득하다. 뫼비우스의 띠 같이 나선형으로 돌려 바깥과 안쪽이 같게 할 때 그 이해가 선명해진다. 참 더디다 싶은데 이뤄지고 보면 길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세례를 받았다. 더 어릴 때부터 호언했지만 세례를 받으면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그리 붙들고 지냈으나 한참동안 나는 그것을 잊고 지냈다. 한사코 외면하여 그저 어릴 적 호기어린 꿈이었거니 여기면서 말이다. 한데 그게 다 정한 때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약을 생각해보면 훨씬 더 이해가 쉽다. 쉰일곱 살에 말씀에 의지하여 떠날 때 누가 알았을까? 그가 백세가 될 때까지 저 역시 나름 가장 현명한 방도를 모색하느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지목하거나 처첩을 두어 이스마엘을 얻기도 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를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합 2:4). 그러할 때 비로소 없어도 부족해도 연약해도 하나님으로 산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3:17-19).”
하박국서를 읽다 나는 이처럼 묵상글을 쓸 수 있는 데 감사하였다. 달려가면서도, 일상에서 수시로 다시 읽으며 이른 아침에 마주하였던 말씀을 되새길 수 있어서 복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게 하신다. 믿음이 나의 생활을 지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곧 내가 살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가 내 안에 계심으로 내가 사는 것이다. 같은 말인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이 전부다. 오늘을 살기 위해 그의 도우심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가 내 안에 계심으로 오늘을 사는 거였다. 가령 ‘이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 누구라도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한데 그게 전부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럴 때 주체는 어려움이 되고 객체는 도우심이 되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의 권능이 아니라 그다. 같은 의미 같은데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겠다.
사는 데 따른 수단과 목적으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자기주장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세상이다. 새로 당을 재건하는데 목사와 집사의 갈등이 꼴불견이다. 뇌물과 청탁으로 사면을 받으면서 그 손에 성경을 들고 서 있는 어느 회장의 모습이 민망하다. 어처구니없는 당대표의 단식 자리에 성경이 놓여 있어서 불편했다. 뭘까? 우린 얼마나 자가당착에 빠져 믿음을 이용하는지 모른다. 어느 목사가 교회재정 몇 백억을 횡령했다는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몇 천억을 들여 교회 건물을 지었다는 교회가 안쓰럽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와 나눌 게 아니라 내 안에 경각심으로 삼는 데 유용하다.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 두렵다. 가만히 묵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그만큼의 믿음을 수단으로 내세우며 스스로 옳다고 여겼을 텐데, 사는 동안 저에게 하나님이란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이용하려 했던 게 아닌가? 너무하다 싶은 모든 것은 위험하다. 교회가 너무 크고, 교인이 너무 많고, 너무 잘 살고, 너무 건강하고, 너무 잘 되는 모든 일이 위태롭다.
모 선교단체의 장이 후원헌금이 너무 적다고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한데 자신은 너무 좋은 외제차를 몰고, 너무 크고 비싼 집에 살면서 그런 소릴 하는 게 맞나 싶다. 얼빠진 정치인처럼, 수백억의 재산을 가진 자가 서민행보를 운운하며 전통시장을 도는 모습이 가증되다. 두려운 일이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말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죄가 나를 주장한다는 게 대단히 끔찍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달콤하다. 성취감도 있고 뿌듯한 기쁨도 준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 믿음을 발판으로 삼고, 은혜를 기회로 여기는 일이다. 안 믿는 자보다 믿는다는 자가 자기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끔찍하다. 달콤해서 아니 더 옳다고 여겨져서 흉악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 곧 홀로 주 앞에 남겨질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기도다. 이내 다른 무엇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게 말씀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데에 주님이 계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나, 오롯한 내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주가 거기에 거하신다. 그런 것 같다. 참으로 주 앞에 서면, 더는 내보일 게 없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그래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 가릴 게 없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누렸을 그 완전한 홀가분함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죄가 없다는 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도 소용이 없는 빛 때문이었다. 어느 때부터 날 위한 기도도 없어졌다. 아픈 것, 어려운 것, 슬픈 것, 힘든 것 그 모든 것들이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중보기도만 남는 것이다.
어떠하든, 어떠하다 해서 그게 뭐 중요한가? 단언컨대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이나 태산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울 게 없다. 감추고 변명하고 전가할 필요도 없다. 구구한 설명도, 어떤 서러움도 아쉬움도 없다. 온전한 발가벗음만이 있다. 내 마음의 고통도 내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과 나눌 수 없다. 저는 알 수 없다. 누구도 참여할 수 없다. 나만 오롯이 나로서 주 앞에 서는 일이다.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성소가 된다는 건 자격이나 요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4-27).” 그 앞에서는 겸손과 신뢰와 기쁨뿐이다. 주신 날을 주 앞에서 살게 하시기를. 맡기신 날의 맡은 바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기를. 아멘.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13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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