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전봉석 2017. 1. 15. 07:35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잠언 15:8-9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1-3

 

 

 

한겨울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글방 안은 전혀 다른 세상 같다. 볕바른 햇살이 창가 가득 듣는 곳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몇 겹으로 껴입었던 몸과 마음을 벗긴다. 눈부시게 볕 좋은 양지바른 자리에서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다 누굴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 일은 복되다. 내게 너무 과분한 주의 사랑이시다. 어디가 아프고 마음이 무거운 일일랑 아무렇지도 않다. 가족과 나에 대한 기도는 적어지고 마음에 두신 일들로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정직한 자의 기도’를 중보기도로 놓고 보면, 애써(원칙에 따라 혹은 정해진 대로) 예배를 도모하는 것보다 주시는 바(두서없이 느닷없이 두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보다. 의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보다 공의를 따라가는 자를 사랑하신다. 전제를 악인으로 정의하신 부분에서 시선을 멈춘다. 흔히 악하다 선하다의 기준이 우리는 너무 도식적이어서 불편하다. 그 구분이 선명할수록 ‘난 그 정도는 아니야’ 하는 발뺌도 쉽다. ‘내가 뭘? 그 정도가 어때서?’

 

예배를 예배하는 것이 악이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악하다. 의식에 형식을 더하고 그 틀에 맞춰 요구와 간섭과 판단을 일삼는 것이 악인의 제사다. 저는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삼는다. 예를 갖춘 옷차림과 친절과 경건의 모양이 말이다. 이를 대치하는 자리에 기도를 두셨는데 앞서 전제가 ‘정직한 자’인 것이 근거다. 정직하지 못한 그 어떤 예식도 악하다. 그럼 정직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공의’다. 공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공의를 따라가는 자로 설명하면서 이를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곧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그와 같은 정직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문맥적으로만 이해해도, 교회의 자랑은 외형도 차별화된 내용도 화려한 제사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인내와 믿음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5).”

 

곧 참 예배는 일상에 더하신 고통을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드리는 것으로 이것이 교회의 자랑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한 표이다. 예배를 예배하고, 찬송을 찬송하며 심지어 말씀을 말씀하는 것들은 ‘악인의 제사’다. 주가 미워하신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성경구절을 읊조리며 복수를 감행하고, 품에 악을 숨기고 맨 앞줄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때로 그 한 장면이 우리의 폐부를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성결과 무관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가 도처에 있다. 이에 반해 ‘공의를 따라가는 자’ 곧 ‘정직한 자의 기도’를 주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하셨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그런 자이면 마땅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하는 마음은 존귀하다.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기도였다. 주를 바라고 그 이름을 찬송하며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쉼 없이 아뢰는 일, 정직한 자란,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이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연합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 ‘연합하여 동거함’은 한 집에 사는 것으로 같은 행동반경 안에서 같이 나누는 식구다. 단지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동거가 기도다. 오늘 잠언의 정직한 자의 기도와 시편의 연합을 한데 묶으면 그 이해가 돈독해진다. 매우 도탑고 신실한 관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나와 너의 관계로 확장된다.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곧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곧 내가 누구를 생각하며 주께 아뢰는 기도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대제사장 아론의 영광에 비할 수 없고 그의 화려하고 엄숙한 예복에도 모자람이 없다. 헐몬 산의 이슬은 이삭이 남긴 축복기도에 선명하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 27:28).”

 

곧 정직한 자의 기도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바로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기도는 흥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수단이다. 곧 영생이라. 모든 문제는 영생으로 통한다. 영생이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드려지는, 정직한 자의 기도는 이 땅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영광의 양광보다 영광스럽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누구를 생각하며, 무엇을 놓고,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아, 그래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사라지고 온통 주의 영광을 위한 기도만 가득하게 되는 것이구나. 기어이 기도는 중보로 승화되어 주의 뜻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라 할 때, 그 문제를 주께 가져간다. 주 앞에 내려놓는다는 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하나 내가 감당할 있는 것을 행한다. 행함으로 주께서 어찌 해결하시는가, 지켜보는 것이다. 이때 주의 친밀하고 친숙하신 손길을 느낀다. 사랑이란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확신한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안 믿는 이에게는 멸망의 증거인데 우리에겐 구원의 증거이다. 이 증거는 아는 사람만 아는, 배워야지 더 배우려고 한다. 이 원리는 공부 잘하는 애가 공부의 부족함을 아는 것과 같다. 아무리 그 중요성을 말해줘도 공부 못하는 애는 이미 자신이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뿐이다.

 

이번 주부터 쌍둥이 아이를 토요일에도 오게 했다. 책을 안 읽고 글을 못 써서, 짧고 명쾌한 수필을 하나씩 필사하게 했다. 다행히 타자를 치는 솜씨는 좋았다. 또박또박 한 편씩 옮겨 적게 하면서 이번 겨울을 나기로 했다. 볕바른 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수필을 옮겨 적을 동안 나는 가만히 십자가를 바라봤다. ‘거기서’ 있는 내가 신기하였다. 이러고 있는 게 좋은 내가 낯설었다. 아이들에게 주일을 청하자 고개를 저었다. 언제쯤 이 아이들을 나오게 하실까? 성급할 거 없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저 아이들이 비록 꼴찌를 하고 고등학교도 가네 못가네 하는 판국이지만, 종일 들어앉아 TV만 보고 게임만 하는 몰골이지만, 나로 하여금 더 두 아이를 곁에 두고 마음을 다하게 하시는 이가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자. 그래도 참 예쁘고 고마운 건 싫다는 소리 안 하고 토요일 그 추운 데도 그 시간에 맞춰서 왔다는 거였다. ‘곧 영생이로다.’ 멀리 보자. ‘거기서’ 두시는 이가 거두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자. 그렇다고 대단히 내가 기도를 잘하고 믿음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엎치락뒤치락 하루에도 열댓 번을 뒤집는다. 못 살겠어서 기도한다.

 

단순하게, 놀랍도록 단순하게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만 되풀이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언제쯤 나의 기도는 공의를 바라는 정직한 자의 기도로 드려질 수 있을까? 주님, 하고 부르면 그저 가슴이 절절할 뿐이다. 아이를 생각하다 입을 삐죽거리고,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아뢰다 송구하고 먹먹하여 다시 또 주님, 하고 부를 따름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저 다만 내 입에 두시는 주여, 하는 부름으로도 충분하였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4).” 곧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그러므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