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전봉석 2017. 1. 11. 07:43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잠언 11:22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시편 129:5

 

 

 

교만은 우리 자신을 먼저 속인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옵 1:3).” 유리한 고지의 바위틈과 높은 지경이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이때 주님은 이를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 이는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죄로 물든 우리에겐 언제든 위험한 것일 수 있다.

 

이를 삼가지 않을 때 ‘돼지 코의 금 고리’로 비유하는 오늘 잠언의 표현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녀석은 전화를 하여 싱거운 듯 수면제를 다 털어 먹었는데도 안 죽었어요, 하였다. 이틀 연속으로 술을 마셨고, 홧김에 헤어진 여자에게 전화를 하였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고 하였다. 아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 역시 덩달아서 속이 울렁거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이를 어쩌나? 말문이 막혔다.

 

어느 주일 날, 설교에 앞서 목사는 자꾸 눈물을 보였다. 이유인즉, 교회 옆 오토바이 대리점 사장이 하루는 술에 잔뜩 취해 교회를 찾아왔다. 횡설수설 자꾸 시비를 걸 듯 말을 하는 것을 나중에 술 깨면 오라고 그냥 돌려보냈다. 그날 밤 그는 자살을 했다. 어느 주일 날 설교에 앞서 들은 이야기가 내내 뇌리에 남았다. 녀석은 그러느라 이틀째 무단으로 일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짜증이 났다. 멋대로 함부로 구는 아이가 성가셨다. 빨리 통화를 끊고 싶었다. 그럴 때 하필 어느 주일 날 있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는 종종 거울을 보며 스스로 만족함을 느낀다. 적당하여서 의기양양한 건 좋으나 넘쳐서 자만하는 자리는 역겹다.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이 기회를 엿본다. 이런저런 유년의 서글픔이 내재되었다가 고작 서너 달 사랑에 빠졌던 아이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이다. 여자에게 채인 것만 눈여겨보는데 나는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글방을 다닌 아이다. 입바른 소리로 야단을 치고 경계할 문제가 아닌데도 나는 소리를 높였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당장 일주일치 수면제를 다 먹었으니 이 일을 어쩐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직장에 전화를 걸어 사실대로 말하라고 일렀다. 정직은 남을 방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부모에게도 알리고 주변에 같이 어울리는 사람에게도 지금의 형편을 말하라고 했다. 도움을 청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속이며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신대원을 마저 마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이 주신 뜬금없는 정직 때문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나이어린 동기들에게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겨를이 없었다. 수업 시간마다 담당교수에게도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전에는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길까봐 악다구니 쓰며 살았다. 동정을 혐오하며 지내왔다. 누가 뭐라 할까봐 내가 먼저 기를 쓰고 잘했다. 그러는 동안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 저들이 나쁜 건지 등짝을 내주고 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인지, 분명한 건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4).” 이제와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훅, 하고 나 역시 안정제를 먹어야 할 판에 나는 짜증 대신에 훈계를 뭐라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주의 도우심을 바라기를 권하였다.

 

물론 나는 아이 때문에 나 역시 도로 약을 먹게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술에 취해 온 자를 목사가 어찌 감당을 할 수 있었겠나? 뒤이은 후회지만 누가 그날 밤 그리 될 줄 알았나? 그럼에도 설교에 앞선 그의 사연과 그러므로 기도를 부탁하던 목사님의 눈물겨운 호소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우리는 모두 사람인 것을, 사람으로 사는 게 주 앞에도 정직한 것을,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된 줄 알고 살았으니 그 결국은 그늘에 숨어 자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냥 아이이기 때문이지, 아이다우려고 할 때 그 꼴도 볼썽사납다. 정직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는 것이다.

 

마침 수업이 이어져야 해서 녀석과 전화를 끊었다. 에돔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단호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나서의 이야기는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돌아보게 한다. 기껏 가랄 땐 마다하다 기어이 엉뚱한 데서 주를 마주하고, 기껏 순종하였으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 하여 골을 부린다. 누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까? 정작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건 저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나 생각하였다. 성도의 특권은 넉넉함이다. 한데 이를 옹색하게 하고는 스스로 골내고 원망한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1).” 어떻게 하라는 소릴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10).”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 그렇지 않고 물러 터져서 헤헤거릴 때 저들은 내 등에다 밭 갈고 고랑을 지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데도 주눅이 들어 겁을 먹는다. 굳게 하지 못한 것은 이내 부수어진다.

 

청문회를 보다, 돼지 코에 금 고리를 걸고도 혼자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놀랐다. 나름의 신념은 아집이 되어 남의 조롱을 받는다. 정직함이란 성향이 아니라 문득 주어지는 용기였다. 본래 사람은 은폐와 조작이 수월하다. 거짓말은 오래된 외투처럼 편하다. 그러나 정직한 자만이 주의 얼굴을 뵌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정직은 곧 의로움이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33:1).”

 

나 또한 연약하여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자고 아이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랬으니까 너도 그럴 거야, 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주의 도우심이 필요했다. 아내는 조직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기도를 부탁하였다. 같이 손을 잡고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우리의 요구가 주의 뜻에 어긋나지 않기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며, 이런 상황을 통해 둔감해진 우리 영혼을 다시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며.

 

아이에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순간 몇 알의 수면제를 털어 넣은 게 얼마나 큰 불충인지. 곧 자기연민은 어떤 교만보다 우위에 있다. 딱 그만큼은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자기연민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것으로 무장하고 그것으로 공격한다. 이별에 따른 아이의 충격도 본래는 누적돼 온 자기연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겠는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평안을 줄 수는 없지만 평안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소개할 수는 있다. 내가 되어줄 수는 없지만 만나게 해줄 수는 있다.

 

그렇다고 나의 체험이 길이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유독 체험을 강조하다보면 비판적이게 된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이를 보면 대체로 남다른 체험을 가졌을 경우가 많다. 이때의 간증은 독이 된다. 물론 우리의 한정된 역할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더욱 같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상책이다. 난 됐고 너만 필요한 은혜란 없다. 그래서 지혜를 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가진 모든 것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지혜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이는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7).”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다. 이는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 안에 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연인,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아이에게 내가 듣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면. 기어이 우리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 성령을 거둔 것은 사람의 거역이었다. 하나님의 연인의 자리에 죄가 있음으로 우리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안정제에 의존해야 하고 각종 의료시설에 나의 병든 몸을 의탁해야 한다. 죄의 구애가 집요하다. 주일엔 왜 안 왔니? 하고 물었더니, 그냥요! 한다. 부디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아두지 않으시길.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이 아이를 붙들어 돌이켜 주시기를. 나의 권리를 내가 주장하는 것이 죄이고 이를 주께 의탁하는 것이 은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살 수 있는 게 은총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곧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