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전봉석 2017. 1. 16. 07:26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6:20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편 134:1-3

 

 

 

조금만 흔들면 가라앉았던 부유물이 한데 뒤엉겨 뿌옇다. 그런 걸 마치 나는 깨끗하였다 자부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닐까? 글방에 혼자 있을 때,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때는 저 혼자 거룩한 줄 안다. 이는 모두 거짓이었던 게, 별 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상하면서 온갖 더러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악을 쓰고 상대를 저주하면서 당장이라고 물어뜯으려는 내 안의 괴물은 여전하였다.

 

말씀에 삼가 주의하는 자는 오간데 없었다. 모든 게 거짓이었을까? 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그게 아니면 나는 살 수가 없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여전하였구나.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주를 의지하게 하시는 것.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오늘 잠언의 말씀을 되뇌며, ‘주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주리오.’ 가만히 선다.

 

어렵고 힘들수록 주를 송축하라. 주를 바라며 주의 성소를 향해 손을 들라. 저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시다. 시온에서 내게 복을 주실 것이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 134:1-3).” 이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하나님과 화평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비록 나는 오늘 추하고 보잘것없으나 주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아, 구원! 나를 이 악에서 구원하실 이는 구주시라.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뭐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아이는 혼자 교실을 지켰다. 체육복을 갈아입던 아이들은 툴툴거리며 혼자 교실에 남는 아이를 향해 ‘넌 좋겠다, 씨’ 하며 부러워하다 비아냥거렸다. 들어오며 나가며 한 마디씩 내뱉는 말과 굳이 말은 하지 않더라도 부러운 듯 냉소적인 시선을 건네는 아이들의 무표정함이 더욱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누가 툭 던진 말이 도화선이 되어 아이들은 다툼이 벌어졌다. 욕설이 오가고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담임이 오고 사태를 진정시킨 뒤 선생은 말했다. ‘너희들이 이해해. 얘는 아픈 아이잖아!’ 꿈이었을까? 화가 났는데 화를 낸 사람이 문제일까, 화를 내게 한 사람이 문제일까?

 

오후 내내 뚱하니 마음이 어려웠다. 주일 날 쓴 식기를 설거지하고 남은 반찬을 비벼서 저녁으로 먹었다. 괜히 미안하고 화가 났다. 돌아보면 이처럼 별 것도 아니었는데… 여전히 나는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운 것일까? 바닥을 드러내고 나면 혐오스러움뿐이다. 상처는 되갚아줌으로 더 큰 상처가 되고, 가해자는 없고 모두는 피해자가 된다. 왜 하필 그때, 낮에 보았던 북극곰을 떠올린 것일까? 온난화로 인해 얼음이 사라지는 가운데 저의 굶주림은 극으로 치달았다. 죄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지구가 병들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나는 할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까? 과연 이 길이 맞나?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실 거라곤 상상이 안 된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4:11).” 조금만 흔들어도 악하고 추한 것들이 풀풀 날린다. 이런 내가 온전히 주를 알 수 있을까?

 

나 하나도 바로 서지 못하는데, 어쩌자고 주는 나를 사랑하신 것일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어떠한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그래서 더욱 주를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다. 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끼면 느낄수록, 감당할 수 없어서, 주체할 수 없는 나를 주 앞에 세우는 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나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그러므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곧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4).” 하여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6).” 말씀에 고개를 묻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