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

전봉석 2017. 1. 17. 07:48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7:22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편 135:16-18

 

 

 

아이는 결국 입원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낸 아이엄마의 문자는 서글퍼보였다. <도움의 장소: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가 이끄는 삶>과 <순종: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는 삶> 두 권의 책을 샀다. 점심을 먹으며 딸애와 아내에게 사과했다. 바닥을 드러내고 민망하여 마음이 어려운데, 이스마엘에게 조롱당하는 어린 이삭과 이내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말씀을 묵상하였다. 이유는 내 안의 이스마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은 조롱당하는 것이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 21:9).” 결국 자신이 궁리하여 그리 선택했던 일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11).” 그것이 합리적이었고 옳다고 여겼으나 두고두고 근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12).”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이스마엘’이 있었다. 나름의 기질이며 성향인 것이다. ‘자의적인 나’다. 이것으로 악하다 선하다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내 안의 ‘이삭’을 놀린다. 저 때문에 불편하다. 사사건건 삐져나오고 툭하면 불거진다. 마른 혈기가 되고 공연한 근심이 된다. 내 안에 묵은 감정이다. 켜켜이 오래된 기억이다. 열등의식이며 그것으로 불거진 자기애다. 이를 내보내야 한다. 저는 엄연히 하나님이 두신 ‘이삭’을 훼방한다. 말씀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는 쫓아내야 한다. 아주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또한 나다.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 이를 읽는다. 저는 심령의 근심인 것이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까지 한 것도 아이엄마가 더욱 마음을 다잡으며 자기무장을 하는 것도, 근심은 공연한 방도를 선택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심령의 근심’에 의해 뼈가 마른다. 온전히 주의 길을 갈 수 없게 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아무리 그렇기로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나? 그도 자식인데….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특징은 부지런함이었다. 훗날 금쪽같은 이삭을 이끌고 모리아 산으로 떠날 때도 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보면 성도의 기본 특징인 것 같다. 성경의 어느 인물도 그리하지 않은 이가 없고 예수님도 아침에 일찍 동산에 나가 기도하셨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데는 결단의 결연함을 엿볼 수 있다. 좌고우면하지 않으려면, 행여 또 망설이느라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마음을 몸을 제어해야 하는데 그 첫걸음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기질이나 옛 성품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죽여야 하는 게 아니라 쫓아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주인 된 자리에서 물러가게 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죽일 수는 없다. 사는 날 동안 같이 살아야 한다. 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분이다. 만일 모두가 저를 죽이려고만 한다면 우린 일률적인 옷차림과 행동과 말투를 가진 정형화된 인물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따라한다는 개념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찬송시를 작시한 윌리암 쿠퍼는 번번이 자살충동을 느끼고 평생을 우울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 29).”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은 우연을 동원하여 나를 일깨우셨다. 딱 창세기 그 부분을 읽을 때였다. 어노힌팅의 찬송가 2집에 실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컥,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없어 주 앞에 앉았다. 눈물이 저 혼자 흘렀다. 내 안의 열등감과 유년의 아픈 기억이 ‘이스마엘’로 남아서 여전히 내 안의 ‘이삭’을 조롱하던 것이다. 이삭이 장성하여 건강할 땐 대적이 될 수 없는데, 어린 이삭은 속수무책이다. 툭하면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고 순간, 자기연민은 독을 뿜으며 필사적으로 공격한다.

 

내 임의로 서로 화해하고 거짓 맹세로 괜찮다하며 지내왔는지 모른다.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7).” 궁극적으로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의 비’를 구한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10:1).” 일제히 그에게 나와서,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4).” 주의 구속하심을 받아야 한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8).”

 

내가 거룩을 이루어갈 수는 없다. 거룩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내 안에 이스마엘이 여전히 머물 수는 없다. 저를 내어보낼 때 그 또한 하나님이 돌보신다. 내가 건사하고 다스려야 하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려고 하면할수록 저는 거슬러 내 안의 거룩을 훼방할 뿐이었다.

 

주님이 온전하신 까닭은 그 안에 주신 영광으로 사셨고 그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시는 거였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내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이스마엘-열등의식은 잘 다독이며 건사하고, 견디며 사는 게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에서 아주 내어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신 영광으로 그 자리를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었다.

 

아이엄마에겐 말해줄 기회가 없었지만, 우리 안의 이스마엘이 얼마나 강건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래층 아이엄마는 형편이 어렵네 궁하네 하는 이유로 아이를 거저 보내다가 피아노를 보내고 태권도를 보내면서 더는 이곳에 보내지 않았다. 물론 아이가 가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아내의 서운한 마음은 알겠으나 이제 그냥 두라고 하였다. 좀 더 가야 할 길이라면 가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겠으니… 참, 사람 마음이 그렇다. 뭘 바라고 한 건 아니라지만 없다 없다하면서 다른 덴 그리 잘 보냈으면서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돈을 안 받고, 또는 주일을 권하면서 주의 사랑으로 대한다는 건 이처럼 빛이 없다.

 

조금은 냉철해야 한다. 내 안에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일은 서글프고 서럽고 착잡한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자기연민은 그 어떤 거역보다 교활하다. 이 정도는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대항이다. 하나님도 이를 어쩔 수는 없다. 그냥 놓아두는 수밖에. 그리하여 세월이 더해지면서 그 무게에 눌려 질식하기 직전, 주여!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나오기까지.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그게 나였다.

 

아이가 결국 입원을 했고, 아래층 아이엄마는 돌연 아이를 더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며, 시무룩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은 부분이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한 내용이었고, 소음을 피해 걸어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재생되고 있었다. 바로 전날 뜬금없이 자기연민에 겨워 소리소리 지르며 바닥을 다 드러낸 뒤에 말이다. 하나님은 일련의 모든 상황을 조성하신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우연을 동원하여 큰 그림의 시나리오를 연출하신다. 일상은 아주 복잡하지만 단순한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렇구나. 그런 예배가 쌓여지고 쌓여가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나아가기까지 합당하여진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4).” 그 길은 멀었다.

 

사흘 길을 걸으며 어떻게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돌아가자! 하고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그에 앞서서는 이스마엘을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그처럼 놓기 싫어하는 나의 자아다. 내 유년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악착같이 견디었던 나의 수고다. 그걸 놓기 싫어서 아이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고, 아래층 아이엄마는 이내 아이 핑계로 돌아섰다. 저마다의 결연한 자기연민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 조롱한다. 마음의 안식이 없다. 이스마엘을 앞서 내보냈던 아브라함은 확신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삭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하실지 알고 있던 건 아니지만, 이스마엘도 거두시고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모든 걸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저는 이제 알고 있었다. 사흘 길 동안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고 침묵하였고 아브라함은 선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였다. 그러므로 이삭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8).” 미뤄 짐작하는 것을 굳건히 의뢰하는 것이 믿음이었다.

 

내 안의 이스마엘은 우상이다. 이건 결코 놓기 싫은, 그러면 죽을 것 같은, 그래서 결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 135:16-18).” 허깨비다. 공허함일 뿐이다. 미련이다. 저는 고통일 뿐이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 17:25).”

 

이를 어쩌면 좋을까?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2-3).”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은 아름다우시다. 어떻게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아브라함은 인격적으로 체험한 그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