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17. 1. 18. 07:47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잠언 18: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늘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엊그제 전화를 주더니 잠깐 바쁘다며 끊고 내처 연락이 없었다. 일 때문에 제주도에 갔고 그래서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 사업을 도와 일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거였다.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으로 칩거를 한지 족히 3년은 다 되었다. 동생 대학 공부를 위해서도 자신이 벌어야 한다. 마침 아버지 일터에 손이 부족하니까, 그렇게 일을 시작한지도 2년이 되었다. 그래도 공부를 포기하지마라. 나의 말은 힘없이 흩어졌다.

 

언젠가 네가 같이 신앙생활할 거라 믿는다. 아이는 싱겁게 웃었다. 고3 때 시험만 끝나면 주일 날 같이 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였던 녀석이다. 이런저런 통화가 길어진 뒤에 끊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를 생각하였고 기도하며 아이를 아뢰었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마음이 기우는 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를 어찌 알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을 집중하고 말을 고르며 적당한 언어 앞에 은혜를 얻는다. 찬송이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찬사다. 이를 위해 내 안의 경탄이 가장 적합한 표현을 고른다. 자, 아이에게 어떤 말로 나의 하나님을 소개하면 좋을까? 약사 애는 또 접촉사고를 낸 모양이다. 의사 남자를 만났던 이야기, 저의 희망은 잘 죽는 일이라고,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게 잘 죽는 것일까? 하고 물었는데 답을 해줄 수 없었다나? 이런. 믿는 자이면 말씀을 안 믿는 자이면 회심을. 더 좋은 수를 나는 모른다.

 

과연 죽을 때 뭘 붙들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각자의 믿음? 혹은 잘 살아온 이력? 나름의 가치관? 좋은 의료진? 사랑하는 가족? 나는 망설임 없이 말씀을 최선으로 두었다. 살면서야 때론 말씀 없이도 잘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죽음 앞에서 과연 무얼 의지할 수 있을까? 그녀를 부르시기 전에 이 부족한 사람을 곁에 두신 데는 말씀 때문이었다. 주님 곁으로 가기 5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키게 하셨던 게 그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말씀을 펴들었고 서로가 같이 읽어가던 그 의미를 나는 잊지 못한다.

 

정말 천국이 있을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 두려움에 떨던 그녀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서 확인했다. 더 좋은 많은 방문객을 마다하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게 어찌 나를 기다렸었겠나? 말씀이었다. 나는 확신하는 바, 다른 건 모르겠고 잘 죽는 길은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다. 길게 설명할 수는 없었고, 단호하게 말씀을 권하였다. 새삼 소리 내어 성경을 읽으면서 그 구절 하나하나에 신중했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왜 저들을 감동시켜 성경으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물론 여전히 거짓 선지자가 난무하고 적그리스도가 활개치고 있지만 말씀이 길을 잃지 않게 하신다.

 

신중하게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 내 안의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일은 말씀으로 교통하는 일이다. 뜬금없이 아, 좋다! 하고 절로 감탄이 드는 때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를 어찌 저 아이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을까? 부디 내 입의 말이 깊은 물과 같고 솟구쳐 흐르는 지혜의 샘이었으면 좋겠다.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잘 사는 길이고 훗날에 가장 잘 죽는 비결일 거였다. 낮에는 중학교 아이 둘이 수업을 와서 <소올 서퍼>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때도 잠깐 했던 말이, 끔찍한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끔찍한 일이 오히려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우울감에 시달리며 집에만 있는 엄마 때문에 종종 죽을 것처럼 힘들어서 더 죽어라 하고 일한다는 아이의 항변에 아팠다. 내가 아는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도 소개할 수 있을까? 반드시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일찍이 남다른 애착으로 글방에 두셨고, 함께 나누게 하셨던 여러 이야기와 오늘의 이런저런 사연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길인 것을 나는 확신한다. 자살충동을 느껴 이내 병원에 입원한 아이도, 산다는 게 뭘까? 답을 찾고자 네팔과 인도로 긴 여행을 떠난 아이에게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때론 이해가 어렵고 더욱 낙심이 되어 쓰러져 좌절할 때도 그것조차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인 것을. 내 안에 두신 이 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하실 것을.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하고 때론 마주하여 할 말도 잃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을까?

 

너무 애쓰지 마라. 기를 쓰고 살려고만 살지 마라. 언제든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시려고 오늘 그 자리에 너를 놓아두신 것임을. 말로써 어찌 아이를 위로할 길이 없어 목이 멨다. 내가 뭘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이 모든 일을 부지런히 관할하시는 성령께서 다루실 것이다. 묵묵히 주어진 일상을 사는 것.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도 의미 있겠으나 그 또한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러하였던 이들이 있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주의 길을 따른다는 게 결코 꽃길이 아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흙길도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일러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죄악 된 나로 인해 통회해 하는 것도 주의 은혜를 더욱 누리기 위함이고,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저들을 위해 주의 이름을 사모할 수 있는 것은 이내 그리스도인의 연인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그만하게 여겨주시는 주의 은총이었다. 왜? 부디 재혼한 아버지 집에서 미워 죽을 것 같은 여자(아이는 새엄마를 그리 불렀다)를 상종도 안 하고 지내는 아이의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아이를 한 번 더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나를 향하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아는 만큼 아이에게도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6).” 다들 참 고단하게 산다. 의사인 부친의 대를 이어 의사인 남자가 고작 가치를 두고 씨름하는 데 잘 죽는 일이라니! 저의 지식이 헛되며 저의 신념이 허망하였다. 부질없는 삶에 대하여 그의 고급진 고민은 죽는 일이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이와 같은 말씀이 가장 잘 죽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주께 맡기는 것. 그 또한 주의 것임을. 내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은 고되다. 왜 아이는 온갖 잡신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로 잘 사는 의미를 찾아 떠난 것일까? 왜 의사 남자는 잘 죽는 일에 그처럼 연구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엄마의 지독한 우울감은 어쩌면 좋을까? 다들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데는 별 수 없다.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면서 가장 멀다. 의지하는 사람이 가장 무거운 법이다. 하물며 돈도 명예도 어림없다. 오직 예수,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온간 잡소리가 잠잠해질 날이 올 것이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 9:36).”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성령이 내 안에 내가 성령 가운데 거할 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그러므로 말씀만 붙들자. 말씀으로만 충분하다. 성경으로 죽자.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그리스도시다.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히 7:21).”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나일진대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말씀뿐이다. 말씀을 소개하고 말씀으로만 살게 하자. 아이와 통화하다, 약사애랑 문자를 하다 다시금 얻은 확신이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