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2 주일
잠언 2:20-22
지혜가 너를
2: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2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들어가는 말
앞서 본문을 잠언 전체의 프롤로그로 새해 첫 주에 말씀을 시작했다. 그 지혜가 길거리에서-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그래서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향해 소리를 높인다(잠 1:20). 어느새 우리 안에는 광장이 들어섰다. 저마다 연합을 꿈꾸며 바벨탑을 건설하는 현장에서도 지혜가 부른다. 시끄러운 길목에서-모퉁이로 돌아 음녀에게로 가는 우리의 발길을 붙든다(21, 7:8). 성문 어귀-젊음을 딛고 성공을 향해 돌진하는 우리에게, 성중에서-소속감에 안도하고 있을 우리에게 소리를 발한다(1:21).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2).” 곧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보자. 돌이켜 지혜를 ㉠받으며, ㉡간직하며, ㉢기울이며, ㉣두며, ㉤구하며, ㉥높이며, ㉦찾으면… 이는 모두 우리의 의지적인 참여다(2:1-4). 그러할 때 ㉠주시며, ㉡내시며, ㉢예비하시며, ㉣되시나니…(6-7).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2:8).”
선한 자의 길
지혜가 우리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한다. 우리가 선을 이룰 수는 없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게 선하게 살라고 보내신 게 아니다. 의인이 되라고 부르신 게 아니다. 어떠하든 우리는 의로울 수 없다. 선을 도모하고 의를 구한다 해도 우리는 악하다. 우리가 선할 수 있는 길은 선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뿐이다. 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바로 그 앎으로 경외한다. 크고 위대하심에 대해 두렵고 경탄해마지않는 환희다. 그와 같은 앎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앎으로, ㉠받으며, ㉡간직하며, ㉢기울이며, ㉣두며, ㉤구하며, ㉥높이며, ㉦찾으면서 나아간다. 아는 자만이 아는 이 신비를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러므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44).”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45-46).” 그 값을 아는 자는 그 어떤 가치보다 그것을 귀히 여길 줄 안다. 그러므로 받고, 간직하고, 마음을 기울이며, 우리 안에 두고, 이를 더욱 구하며, 높이며, 찾는 것이다. 이를 모르는 자들이 뭐라 하든,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6).” 선한 자의 길을 간다. 왜 우리만 그러는가? 아니다. 어느 훗날에 만나게 될, 앞서간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의인의 길
결코 우리 의지로는 갈 수 없다. 감당할 수도 없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팔복, 산상수훈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건 우리로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되레 스스로 복을 도모하는 자는 위선적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인이 되는 경우는 악하다. 성경에서 가장 만족해하고 황홀해하던 사람들은 역시 바리새인들이었다. 저들은 스스로 감사에 겨워 만족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1:18).”
자기만족은 추하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어느 훗날 저들은 목청껏 외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이 얼마나 절절한가? 그런데 황망할 따름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또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6-27).” 그러므로 의인의 길은 그런 게 아니다. 정작 저는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한다. 주를 위해 무엇을 한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혹여나 자신이 드러날까 하여 말씀만을 붙든다. 그러할 때 주가 하신다. 주님이 ㉠주시며, ㉡내시며, ㉢예비하시며, ㉣방패가 되시나니… 이는 결국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8).” 곧 의인의 길을 지키신다(20).
정직한 자는 땅
여기서의 땅은 이 세상이 아니면서 동시에 일상적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여기에 살면서 ‘거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여기 이 땅의 특징은 그럼 무엇일까?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 자 저들의 특징은 결론적으로 영육간의 멸망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신은 배였다. 실제 오장육부의 만족을 위해 살았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 먹는 것뿐이던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오늘 우리 사회의 일련의 사태를 보며 온갖 방송에서 늘어놓는 수다를 보자. 온통 남 얘기로 시청자들 배를 불린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우리 믿는 자의 배는 어떠한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곧 정직한 자의 땅은 그가 펼쳐놓은 말들의 터전 위에 건설된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라. 저들이 주를 찬송하며 고백하였던 그 고결한 언어의 땅을 딛고 오늘 날 우리가 걸어간다. 그러므로 의인은 죽어서도 강건하다.
개인적으로 요즘 내가 흠뻑 빠져 있는 인물이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4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가 남기고 간 설교와 묵상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오늘 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토양이 되고 있다. 1672년, 12년 동안 감옥에서 묵상하였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오늘 날에까지도 성경 다음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18세기, 늘 우울감에 시달렸던 윌리엄 쿠퍼의 찬송시가 오늘 날에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찬송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1747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예일 대학에서 쫓겨나 7년간 인디언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10월 9일 조나단 에드워즈 저택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그때 7년간의 선교 일기는 오늘까지도 새로운 선교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노예무역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1725-1807)은 훗날 목사가 되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작사하며 누구보다 인자하고 온화한 목회자가 되었다. 1760년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 이후로 내가 아는 한 나는 나처럼 무모하고 신성모독을 일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다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직한 자의 땅은 결코 여기가 아니면 장차 우리에게 예비 된 저 본향의 땅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완전한 자는 땅
정직한 자 곧 완전한 자의 서로 닮은 공통된 사실은 주의 은혜로 사로잡혀 살았다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주 찬양, 주 찬양 내 마음 다해/ 주 찬양, 주 찬양 내 생명 다해.’ 노예선 선장 존 뉴턴의 고백이 어디 저만의 것이겠는가? 완전한 자의 땅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이 “거기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적신다. 우리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도 울려 퍼진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완전한 자의 땅이란 결코 허황되지 아니하다. 막연하지 않으며 현실도피로의 낭만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찬송이 나오는 사람들이다. 조건이나 결과에 따른 감사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찬송을 올려드릴 수 있게 하시는 데서 비롯된다. 위기를 두시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하시는 까닭은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시는 거였다. 그러므로 위기를 해결해주시기보다 함께 하시고 고통을 처리해주시기보다 같이 계신다.
염려하지 말자. 근심하지 말자. 우리는 여러 참새보다 귀하다.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7).” 이에 우리는 완전한 자의 땅에서 정직한 자로 살 것이다.
나오는 말
때로 우리의 일상은 무료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늘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지 모르나 그와 같은 일상을 지나는 동안 아이는 걸음을 떼고 말을 배우며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할 때, 정작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따로 있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헛되이 맹세할 것도 굳은 결심과 각오도 필요치 않다. 오직 예수,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우리에게는 예수밖에 없다. 정직한 자는 그 땅에 거하고 완전한 자는 바로 그의 땅 위에 남을 것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인생이라는 바람이 그치고 나면 저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온 데 간 데 없어져도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내가 그러할 수 있는 까닭은 나의 뿌리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이기 때문이다. 주의 권능하신 지혜가 오늘도 우리를 이끄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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