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전봉석 2017. 2. 5. 07:43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잠언 5:1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8

 

 

 

토요일이면 아내가 나와 로마서를 읽고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 어제는 컵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앞으로 가정예배를 저녁마다 교회에서 드리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여기’를 교회로, 교회를 더욱 교회로 여기게 하고 싶어서였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이 가야 할 일이다. 딸애는 늘 기도할 때,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라고 표현한다. 그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가장 한심한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게 가족이다. 서로의 못나고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맡아서 이뤄가는 게 교회다. 게 주님의 몸이다.

 

곧 개개의 지체가 교회고 일가를 이뤄 서로를 품은 게 가정교회며 이를 사명으로 다하는 게 목회일 거였다. 못나면 못난 대로 잘나면 잘난 대로 것 또한 십자가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뭔가 거창하게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해 뭘 어찌하는 게 아니었다. 날마다 접하는 현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일심을 다하는 게 경건이다. 주님의 30년 가정생활은 결코 은둔이 아니었다. 사역은 3년의 공생애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무심한 듯 한 날 한 날의 일상이 곧 사명이었다.

 

물을 긷고 나무를 다듬어 탁자를 만들고 완성된 의자를 배달하고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며 부모를 섬기는 그 모든 일상의 평범한 일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기리는 사역이었고 사명일 거였다. 글방이 들어 있는 같은 공간 안에서 몇 주째 공사가 이어지고 있고, 나는 커피를 내려 그때마다 한 병씩 내다주고 간간히 복도를 걸레질하는 것으로 저들과 같은 동시간대를 사는 것이다. 밖에 청소부 아주머니가 걸레질을 하고 있으면 유자차를 한 잔 내어드리는 일로, 그저 그게 다인 것 같지만 사역이다. 사역은 사는 일이다.

 

우리에게 두신 ‘30년의 시간’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도 결코 헛되지 않다. 나의 젊은 동기 전도사 내외의 고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였다. 교회에 전임으로 있을지, 파트로 해야 할지, 개척을 할지, 어디 선교단체에서 일을 배워야 할지… 물론 이런저런 남모르는 사정이 있겠으나 그것으로 주의 일을 가늠하고 가장 좋은 일을 모색하는 데 감사하였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 길을 어찌 인도하실지는 알 수 없으나 말씀으로 말씀만은 굳게 붙들자고 말해주었다.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하는 게 참 고약할 정도로 잘 내키지 않지만 그것까지 쥐고 있는 걸 놓아드리는 게, 감당이었다.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건 실제 내가 뭘 어떻게 하려는 모든 걸 이양하는 일이다. 주님이 마음껏 나를 사용하실 수 있게 내 힘을 빼는 것이 순종이었다. 이내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런데 그걸 바라면 바랄수록 나는 결코 그리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절감한다. 그럴 수 없어하는 내게 성경은 한 방 더 먹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결국 나는 갈등한다. 갈등은 내게 시달리는 것이다. 이러자니 저게 그렇고, 저러자니 이게 또 그런, 갈등은 번져 우리 안에는 분란이 일어난다. 원 당최,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다보면 ‘너만 없었으면 좋겠다.’ 성가시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고, 빨리 공사가 끝났으면 좋겠고, 성가시게 구는 모든 일이 좀 잠잠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게 인생이고 그 가운데 놓아두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형제들은 믿지 않고 부모는 긴가민가 하는 와중에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그 뜻을 다하는 게 ‘30년’의 생활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심지어 나를 대적하고 멀리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일삼는 사이라면 어떻게 그 등살에 배겨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단순논리다. 저가 아니라 저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사건의 표면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 뜻을 감추신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아내가 좀 더 신앙적으로(?) 성숙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좀 의지하고 함께 같은 것을 고민하고 대화를 나누고 격려와 응원을 얻고 싶다. 한데 어쩔 땐 다른 누구를 대하는 일보다 어렵다. 남이면 적당한 거리가 매겨졌으니 서로 그 지점에서 마주할 뿐이다. 한데 부부라는 게 별 꼴을 다 보고 사는 사이다 보니, 때론 내 안에 드는 답답함과 서운함이 실은 아내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인 것이다. 나도 그만큼 못 살면서 아내에게 요구하는 삶이 허황하다. 그래놓고는 내가 되레 퉁명스럽다.

 

기껏 성경공부를 하다 뚱해져서 끝났다. 저녁께 다시 만나 장을 보는데 아래층 아이엄마 얘기를 하였다. 일찌감치 술을 먹고 취해 곯아떨어졌다. 말 그대로 자꾸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니까 아이가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내려가 바닥을 깔고 베개로 둘러 자리를 봐주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제 아홉 살 되는 딸애는 술에 곯아떨어진 엄마가 걱정되면서도 혼자 마음껏 TV를 볼 수 있어서 좋아했다. 아내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그래도 다른 친척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데려다 키울 수는 없는 거지? 하고 물었다.

 

공연한 소리였겠으나 함께 걸어오면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뭔가 나는 고상을 떨며 말씀 운운하고 그게 사역이네 목회네 하는 마음으로 으스댔지 않았나? 그러면서 제때 기도도 안 하고 성경도 안 본다고 아내를 탓하고 구박하던 마음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는 아내에게 두신 ‘30년’의 평범한 일상을 주의 이름으로 다하고 있는 거였다. 같이 데려다 저녁을 먹일까? 하다 그렇게 잠든 엄마를 불안해하느라 꼼짝 않을 아이를 생각하며 그냥 뒀다.

 

여기서 더 놀라운 건, 아이가 결코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되바라지고 시쳇말로 싸가지가 없다. 눈치가 빨라 어른 상투 끝을 쥐고 흔든다. 가끔 아이가 저지르는 일을 들어보면 밉상도 그런 밉상이 없다. 아내도 늘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런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나는 그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을 아내는 덤덤하니 실천하고 있었다. 아이를 생각하면 답이 없으니까, 주여… 하고 긴 한숨을 몰아쉬면서, 그럼에도 기어이 곁에 두신 데는 다 주의 뜻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건강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잘 살지 말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두신 가난도 질병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사는 게 사역이다. 주신 바, 그 맡기신 일상을 온전히 주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것이 목회다. 목사는 뭔가 대단한 사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특혜를 입은 자들일 뿐이다. 성경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교회 안에서 늘 거주할 수 있으며 보는 사람마다 대놓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얼마나 치열하고 원통하고 답답한가 말이다. 저가 믿는 사람이라고 직장에서 대놓고 하나님만 얘기할 수 있나? 그러니 마음껏 성경을 읽기를 하나 기도하고 싶을 때 교회에 머물고 싶을 때 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목사로 산다는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이다. 그걸 더 거룩하게 여기고 뭔가 의미를 더 부여해서 저들과 차별을 둔다면, 바리새인이 그러했다. 예수님의 30년은 물론 공생애 3년의 시간도 그런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저들 가운데 계셨다.

 

이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내가 좀 어떻게 잘해보려고 하는 궁리라면 선하지 못하다. 우리의 ‘이게 아닐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만 소용돼야 한다. 나는 늘 내가 별난 줄 알았다. 인생의 대부분이 열외였다. 특혜를 입고 사는 자였다. 목사가 된 것도 특혜다. 다른 이들은 어찌 여기는가 모르겠는데, 네게 목사란 별난 게 아니다. 그만큼의 은택을 입은 자로서 더더욱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송구함으로 살아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가 하신다. 나는 그저 나 하나 건사하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30년’의 일상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공생애 3년으로 나의 모든 날들이 채워지고 가려져서 은혜 가운데 더욱 은총을 입는 것뿐이다.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인생이란 내 것으로 출발한 게 없었다. ‘헤아리지 못할, 그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낮에는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며 좀 더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자고 다그치며 속상해했던 내 마음이 실제 아내의 ‘30년’을 보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를 데려다 키울 수도 없고, 하는 말에서 아내의 진심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묵묵한 마음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는 게 사역이고 사는 날 동안이 목회다. 우리의 산다는 건, 신자란 주신 이의 뜻을 살피고 곁에 두시는 이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를 나는 이론으로 주물럭대고 있었는데 아내는 실제 삶으로 살고 있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