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0-23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10시를 조금 넘겼을까? 아이는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했다며 한 달여 만에 전화를 주었다. 그 길로 주일예배에 왔으면 좋겠는데, 부모가 직접 동의를 해야 퇴원이 된다고 해서 같이 있다고 하였다. 큰 애는 아무래도 이제 직장 생활을 하여서 예배에는 나오기 어려운가, 하고 마음 졸이고 있는데 늦게라도 왔다. 아직 공사 중이어서 주방을 쓸 수 없었다. 밖에 나가 점심을 먹었는데 큰 애가 선뜻 밥값을 모두 계산하였다. 것도 기특한데 돌아가고 아이의 헌금을 정리하다보니 ‘10만원’이 들어있었다. 코끝이 시큰하였다.
작은 애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 돌아오는 목요일에 성경공부를 마저 하고 외조카와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그 빈자리를 네가 채워라, 하고 외조카에게 건넸더니 의외로 그래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도로 넘어간 아이가 카톡으로 안부를 전해왔다. 그런 것인가? 아들 녀석은 필리핀에서 감기가 심해 결국 링거를 맞고 가까운 교회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결핵 약을 먹고 있어서 다른 약을 먹을 수 없어 더 고생이었다.
한 영혼을 품고 가는 일이 천하를 얻는 일보다 귀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자식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이래저래 손이 가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부쩍 자란 아이들이 놀랍다. 궂은 날씨여서 몸이 아팠다. 참 못 나고 지질한 사람인데 내가 복이 많다. 미지근하니 맹탕인 것 같은데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게 하시는 이가 책임지시는 거였다. 얼마를 헌금했느냐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주신 데 놀랐다. 능숙하게 반주를 잘해서가 아니라 싫다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과연 올까? 싶지만 내가 안달할 게 아니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바울의 마음도 항상 그러했다. 행여 다시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마음이 쓰이는 건 주가 그리 두시는 거였다. 꾸준히 내가 주께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이 중보였다. 이런 마음이 결국 주께서 주시는 게 아니면 나는 설명이 안 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곧 ‘나를 위한 기도’보다 ‘너를 위한 기도’가 그 효력이 높다. 주께 더 많이 담대하게 아뢸 수 있는 것이다. 당최 내가 왜 얘 때문에 이처럼 마음을 졸이는지, 나는 때로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 기도는 마음에 두는 것이다. 아니 마음이 기운 쪽으로 흐르는 ‘어떤 마음’이다. 그걸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런 것이구나. 너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 마음이 더 안 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만두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마음이 기우는 일도 그런 거였다. 기운 마음으로는 못 견디겠어서 내가 살자고 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중보기도였다. 서걱서걱 모래알갱이가 쓸리는 것처럼 껄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거였다. 마음이 기운 데 몸이 간다. 몸이 절로 숙여져 시선이 향한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계1:12).”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이다.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나 또한 신기할 뿐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것으로 자식 일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 아내는 저녁 내내 누구와 그렇게 통화를 했다. 개학을 앞두고 아이엄마들과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는 모양인데, 돈돈거릴 때는 이 또한 구차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게 아이들이 너무 고달프다. 이혼한 가정이 수두룩하고 술에 절어 사는 엄마와 실제 저녁이면 바에 나가 술을 따르는 엄마와 폭언과 무관심을 일삼는 엄마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엄마와….
일일이 그 속사정을 내가 진술할 수는 없으나, 어쩜 이렇게 다들 ‘이상한 아이들’만 보내시는지 모르겠다. 그게 또 어쩌다보니 글방과 이어지게 되고 우린 이제 아이의 생활을 살피는 정도에서 그 영혼을 두고 기도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병이 너무 깊다. 혼자 방치된 건 물론이고 속수무책 온갖 불순한 것들에 노출된 게 안타깝다. 한 아이엄마는 친정엄마 제사를 다녀와서 다시 술에 취해 널브러졌고 아이는 혼자 무서워서 전화를 하였다. 밥은 먹었는지, 문을 잘 잠갔는지, 혼자 잘 수 있겠는지… 아내의 통화는 길어졌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싶은데, 딱 그만큼 그렇게 곁에 두신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온유를 알게 하신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그리 두시는 데야 별 수 있나? 우리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 이를 온유함으로 마주하라는 것. 그것은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마음이다. 하나님은 부러 더 어려움을 두셨다. 장애물을 치워주지 않으신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장애물을 치우고 통과하려는 데만 급급하다보면 쉬 지치고 그릇 행하기 일쑤다. 자꾸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들면 그렇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장애물을 치우는 게 중요하지 않으시다. 그것으로 주를 부르게 하고 그와 같은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신다. 그것이 더 큰 은혜였음을 기도로 알게 하신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그게 사역이다. 목회는 당신이 한다. 하고 말해주었다. 날더러 어쩌란 말야? 하면서도 아이가 신경 쓰여 내려가 보는 건 아내였다. 참나. 그런 마음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고는 답이 안 된다.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걸, 여태 우린 문제만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진땀을 쏟았다. 어떤 장애물이 닥치면 그걸 어떻게든 치워보려고만 하였다. 그러느라 구차하고 빙충맞고 처량했던 거였다. 그런들! 마치 허들경기처럼 넘고 나면 또 있고 넘고 나면 또 있고 하는 데야 별 수 있나? 어느 약초꾼의 이야기에 그 진리가 내포돼 있었다. 저는 험산준령 계곡을 타고 절벽에 매달려 풀을 뜯었다. 심심하니 평지에 곧게 자란 풀은 독초가 많고 모진 바람과 척박한 흙에 뿌리를 내리고 견딘 풀은 귀하디귀한 약초가 많았다.
그러게.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초가 되신다. 당신의 값진 은혜를 더욱 그 가치에 맞게 사용하시려고 모진 세파와 척박한 돌 위에서의 처절함을 놓아두신다. 결국은 순종이다. 순종은 두신 바 그 자리에서 참고 견디는 과정이었다. 결국 마음의 청결함도 온유함도 애통해 하는 마음도 거기에서였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실제는 죽겠다 죽겠다하지만 이보다 더 편한 삶도 없었다. 그간 주가 다 하고 계셨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3).” 은밀한 중에 숨은 재물 같은, 흑암 중의 보화는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찬연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오늘 잠언의 지혜는 간곡하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확신하는 것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를 아는 자가 주께 피한다. 내가 어찌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주께 맡긴다. 이는 방관이 아니라 더욱 확고한 믿음이었다.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할 때는 구차하던 것이 주의 이름으로 마주하면서는 사명이 되었다. 돈돈거릴 때는 ‘먹고 살기 힘들다.’ 정도의 값어치였다면 그 한 영혼을 붙들 때 그 안에 주의 보호하심이 있었다. 곧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왜 성경은 일관되게 주의 이름을 앞에 두는지 알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그것은 결국 소망을 이룬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렇구나. 큰 애의 모습에서 소망을 보았다. 건성으로 답하는 것 같지만 외조카의 대답에서 주의 원대한 계획을 읽었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런 것이다. 이 소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주의 사랑이 내 안에 부어진 바 된 증거다. 이는 내가 연약할 때, 그럴 자격도 기준도 갖추지 못하였을 때 주가 나를 위해 죽으셨던 바로 그 사랑이다.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내 곁에 나를 닮은 아이들을 두심으로 알게 하신다. 얘들은 결코 이상한 애들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알게 한다.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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