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전봉석 2017. 2. 7. 07:47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잠언 7:4-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편 6:5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심지어는 버림받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하나님은 이상한 분 같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서운하고 때론 서러워도 엄마 품에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아이의 마음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 낙심은 내가 가지고 있는 허상을 끝까지 고집할 때 드는 적개심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자는 붙든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아무리 고달프고 한심하다 해도 생을 휘젓는 슬픔의 한복판에서야 누군들 주께 감사할 수 있겠나만,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 그래서 우린 기도할 때 자주 함정에 빠진다. 어떤 기적을 바라느라 곁에 둔 순종을 미루는 것이다. 뭔가 획기적이고 깜짝 놀랄 일을 기대하느라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놓친다.

 

알 수 없는 것을 구하면서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 믿음은 늪 같아서 자신이 믿음을 믿는 일은 위태롭다. 교회를 안 가도, 말씀을 굳이 안 읽어도, 기도를 하지 않아도, 그러다 어쨌든 죽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 받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아이가 물었다. 자신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라고 항변하듯이 말이다.

 

그 아이가 목요일에 오려나? 같이 데려온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다. 문득 말씀을 읽고 설핏 돌아서는 동안에도 아이가 생각났다. 내 안에 두시는 데는 별 수 없었다.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기도하는 게 일이다. 주님, 하고 나는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여기며 살았던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구원 받을 자로 예정하사 택함 받은 백성이라면, 내 아무리 개판으로 살아도 주가 건져주실 것이다. 하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10).”

 

그러는 동안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게 옳은 줄 알았다. 애쓰고, 수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인정받고자 몸부림치는, 돌아보면 내가 그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게 아니었다. 그게 나의 권리라고 여겼으나, 고단함에 대하여 이제는 보인다. 안 그래도 되는데, 싶다. 그처럼 애쓰느라 삶은 점점 피폐해지는 것이다. 거짓이 거짓을 끌어내어 위선을 덧댄다. 거짓이 진실이 되었다. 악착같아지고 죽기 살기로 무정하다. 아, 죄를 두른 외투는 우리를 강퍅하게 한다.

 

사장이 건너와 두런두런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그래서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할 때, 그저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바란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는 자기 자랑으로 흘렀다가 그 덧없음에 대해 한숨짓다가도 다시 또 완고해지는 것이다. 안 그래도 되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것을 마치 실패자의 위로쯤으로 생각하니 어쩌나.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구나. 한 영혼을 바르게 다시 세우는 데 있어 이를 강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그 잔인한 기다림을 자처하시는 거였구나. 그냥 이렇게 해서 저렇게 뚝딱 만들어 가시면 될 텐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건 참으로 혹독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죄란 그처럼 맹랑하였다.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주의다. 이내 벼랑 끝으로 떨어지면서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었다. 것도 그게 은혜였다. 영영 다시는 기회가 없는 영혼들에 대하여는, 거기가 지옥이었다.

 

이제는 허물없이 다가와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에게 나는 그저 들음으로 저의 헛헛함을 주께 고한다. 보면 어디가 엉켰다. 안 사람은 자꾸 교회를 옮기고, 큰 아들은 기어이 교회를 안 다니겠다고 하였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왔다가는 걸 강조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왜 저를 내게 말하게 하실까? 이상하게 제 말만 하게 되네요. 사장은 무안한지 한참 떠들다가도 실없이 허허 웃었다. 자기주장을 붙들고 있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한들, 그래서 나는 듣고 들으면서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잠 7:8-9).” 죄가 죄로 여겨지면 죄가 아니다. 죄는 죄다 죄 같지 않다. 이게 뭐? 다 그런 거지 뭘! 안 그렇습니까? 요약하자면 저의 말은 이것이었다. 자신을 두둔하고 그러는 게 틀리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자식을 훈계할 줄 모르고, 아내의 배회를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한다. 종교는 그 정도면 되는 것이죠.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이내 돌이켜 지혜를 내 누이라 부르게 될지, 그렇게 그만 음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될지, 나는 모른다. 끊임없이 사탄은 더 넓고 편하고 빠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왜 그처럼 대처가 느리실까? 왜 오래 걸리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도 든다. 그런데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결국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5:8).”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까지 그 먼 길을 자처하셨다. 거기다대고 사탄은 공공연하게 더 쉽고 더 빠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또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 더 나아가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

 

인내는 제사보다 낫다. 이게 아닌데 싶지만,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에 전혀 응답이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씩 참고 견디는 게 순종이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오전에 불쑥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면서 늘어놓았던 저의 말을 종일 되새긴 셈이다. 그렇구나. 저에게 우리의 먼 길은 한심하게 여기지는 것이겠구나.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런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 없겠구나, 싶었다. 뭐라 한들, 결국 살아서 사는 동안에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면 어쩌겠나? 자기 고집에 등살 터진 줄 모르고 이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나는 진리다, 하고 말하고 우릴 혼자 두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내 의지 내 노력이 다 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신다.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언제든 돌아볼 것을 말이다. 영적인 좌절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저도 예전엔 신앙이 좋았습니다. 믿었었어요. 열심히 다녔었다니까요. 어머니가 신앙이 좋으세요. 이모부가 목사님이십니다. 저의 말은 변죽을 울리듯 남의 다리만 긁고 있었다.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오늘은 전적으로 주의 은혜인 것을 확인하였다. 어떻게 나 같은 자를 돌이켜 다시 주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는지…. 듣다보면 저의 말이 내 말이었다. 아이들의 형편이 나의 사정이었고 저들의 완고함이 나의 의로움이었다. 그래서 딱 그만큼, 나를 닮은 사람들을 곁에 두시는가! 화가 나다가도, 안타깝다가도, 안 됐고 불쌍하고 측은하여서 저를 주께 아뢰는 것이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잠 7:4).” 같이 더불어 살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홀연히 나 또한 골목길 후미진 음녀의 마당을 밟게 될지 모른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3).” 지혜자는 당부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5).”

 

왜 그처럼 강퍅해지는지, 왜 그처럼 자기합리화에 젖어 사는지, 왜 그처럼 자기 말에 능숙한 자로 자신을 두둔하려고만 하는지, 왜 그처럼 그러면서도 ‘나도 그땐 그랬었지’ 하고 회상하고 있는지… 알겠다. 그 안에 작동하는 신호가 있다. 뚜뚜- 뚜뚜- 모스부호처럼, 주가 부르시는 거였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1:20-22).”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책임감에서 놓여나지 않으면 어림없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그렇구나, 그러셨구나! 그래서이셨구나…. 종일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