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전봉석 2017. 2. 9. 07:33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잠언 9:9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들을 귀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저는 의로운 사람이다. 선을 행하고 의를 다루어서 의로운 게 아니라 주를 경외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자를 앎으로 명철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주가 지으신 천하 만물을 보며 사람의 사람됨을 안다. 주가 생각하시는 그 인자하심으로 돌보시기 때문에 영화로운 것을 말이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처음에 사람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었다. 다스려 지켜 통치하는 자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본래 그렇게 지으셨다. 그리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다만 그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었다. 한데 죄가 들어오면서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기를 바랐고, 이로 인해 만물의 통치권도 상실했다. 지혜는 이를 아는 것이다. 본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었고 내가 이 땅의 종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이 생각하십니까?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그녀는 정작 자신이 행한 일이 그처럼 대단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주께 받은 은혜에 자신을 깨뜨려 부어짐으로 ‘하나님의 낭비’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 같은 자를 위해 주가 직접 십자가를 지시며 죽어주시기까지 하시는가! 해와 달과 바람과 별과 꽃과 나무와 물과 물고기와 온갖 새와 짐승을 온 천지에 놓아두시는지. 아무도 여인의 낭비를 칭찬하지 않았지만 주님만 저를 인정하여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9).”

 

아침에 올라가 마가복음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어제그제 나는 자꾸 이 대목에서 머물게 된다. 그런 거 보면 낭비의 대명사는 하나님이시지 않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 유구한 시간을 낭비하고 계시는 걸까? ‘하나님의 기다리심’만큼 의식적인 낭비가 또 있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 그게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낭비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내가 주를 바랄 수 있었을까?

 

당최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은! 믿는 자의 허무하기 짝이 없는 낭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거였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나는 초등부 아이들 수업을 앞두고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아내도 수업이 있어 나와 줄 수 없었다. 모처럼(?) 초조하여 아이들이 오기 한 시간 전부터 마음이 콩콩 뛰었다. 재잘거리며 아이들이 모이고, 같이 알퐁스도데의 <별>을 읽었다. 초등부 기출문제를 같이 풀었다. 특히 자주 아프고 예민하게 구는 아이가 마음에 쓰였다.

 

무사히(?)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안도의 긴 한숨이 나왔다. 기진하여 허한 마음으로 있을 때 글방 주인여자가 왔다.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는 둘째아이를 같이 수업에 보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게. 이건 또 뭘까? 나는 병적으로 예민하여 약을 먹고 안정을 도모하며 ‘괜한 일’을 하나? 싶었는데, 나의 낭비는 주님의 낭비를 닮았다! 얘들을 뭐에 쓰나? 싶게 툭하면 두려움에 떨고, 잠깐이라도 같이 기도할 줄 모르며, 천방지축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 시시덕거리는 게 아니었나?

 

그렇구나. 주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모든 게 낭비 같으나 실은 ‘부어짐’이었구나. 이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고 계셨구나. 사람이 우릴 필요로 한다고 해서 사명이 아니었다. 시대정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려 아는 마음이 필요하였다. 뜬금없이 오랜만에 한 친구가 카톡을 주어, 모 작가의 신작 소개와 함께 저의 인터뷰가 담긴 동영상을 보내왔다. 아마도 내가 참 많이 좋아했던 소설가여서 부러 더 그랬던가 보다. 저의 발언에 대해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현실인식이 참으로 서글프다.’고 하였다.

 

나도 친구의 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 쪽도 아닌 자리에서 생각할 것이다. 흑과 백, 선과 악,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악을 악하다고 욕하기에 앞서 나의 악에 대하여 통회한다. 선을 도모하는 자리라 하지만 행여 그것이 나의 신조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냐가 아니라 모든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일일거야. 기도가 많이 필요한 시절이다.’ 하고 답을 보냈다.

 

시대에 필요한 게 사명이 아니다. 사람이 필요로 한다고 소명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7).” 성령의 이해가 아니고는 이 말씀을 어찌 받을 수 있을까? 예수님의 전적인 관심은 우리의 구원이었다. 특히 요한복음은 이를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영생을 말하고 계신다. 이는 예수시라. 저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지혜의 근본이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곧 사느라 사는 모든 일상의 수고와 애씀이 저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낭비됨이다. 부어지는 것이다. 나를 깨뜨려 주의 발 앞에 부어지는 삶은 굳이 그것이 어떤 의미냐고 되묻지 않는다. 그만큼의 대단한 가치인 줄도 몰랐다. 마리아는 다만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뿐이다. 의도해서 그래야 한다는 당위에 따라 부담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 옥합을 깨뜨린 게 아니었다.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데 주님만이 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6, 8).” 거룩에 참여한다는 일은, 참 소명은 그것을 애써 소명이라고 명명하지도 못한다. 감히 거룩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그저 주의 머리에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씻길 따름이다. 왜냐하면 내게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낭비 그 이상의 낭비였으니까 말이다.

 

아, 그 숱한 쓸데없는 기다림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도대체 나 같은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리시고, 헛된 일에 빠져 주를 모욕하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모른다고 할 때도 변함없이 낭비되셨는지… 만일 그와 같은 주의 낭비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나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세상에서 종노릇하고 있을 게 아니던가. 이 얼마나 모순 된 명제인지! 나의 주인이 나일 때 나는 종이었다. 한데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한 뒤 더는 어느 정당, 사람, 어떤 사상과 가치관과 기준에 억매이지 않게 됐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사람과 이 시대의 필요가 나의 소명이 아니다. 그 부르심은 주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동일하다. 생수의 강이 나의 더럽고 추한 배에서 흘러나온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은 없다. 병들고 소외된 자들만을 위한 예수는 없다. 예수는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주께서 허비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우리의 부어짐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기려 나타날 것이다. 곧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러므로 우린, 예수만 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 12:7).”

 

비로소 내가 포도 알갱이로 맺히는 것은 물론 으깨어져 포도주가 되기까지, 부스러기도 남긴 바 됨이 없이 떼어져서 고루 나누이는 떡이 되기까지, 주께서 건네시는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삶으로, 날마다 성찬이다. 비록 여지없이 못나고 부족하여 애들과 수업하는데도 쩔쩔매는 위인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중하게 한 영혼을 대하고 바라며 주의 뜻을 살피는 삶으로,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다하는 게 부어지는 거였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이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게 더하신 주의 은혜가 사무쳐서 나의 배에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