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7
일심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복되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막 9:8).” 이것이 상실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앞서 변형되신 주님과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3-4).” 이와 같은 특별한 경험이 주는 환희 때문이다. 가령 내가 어릴 때 수련회를 가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였을 때의 황홀함이겠다.
한데 주님은 일상을 깨우신다. 평범한 삶으로 이끄신다. 하긴, 각자의 나름 찬란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으라면 죽을 것 같은 무아지경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몰아의 상태에서 기쁨과 환희에 들떠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8).” 한데 뭔가 특별하게 또는 환희에 들떠 평범함과 일상을 팽개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9).” 산을 내려와야 하고 기어이 산 아래 광장에서, 시장 통에서, 성문어귀 성중에서 저들 무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곳에 지혜가 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잠 1:20-21).”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연속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 믿는 자의 삶의 진정성은 일심이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주의 사랑을 입는다. 주를 간절히 찾는 자가 주를 만난다. 양심껏 선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옳았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내 우리들도 또한 저들에게 빛이어야 한다.
어떻게 지내? 하고 누가 물으면 늘 똑같아!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하나님은 매우 특별하신 분이지만 지극히 평범하시기도 하다. 모든 자연과 평범함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물론 하나님은 아니다. 어디든지 계시지만 어디에도 없으시다. 요즘 부쩍 목사들이 정치 전면에 배치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속상하다. 태극기와 함께 십자가를 들고 보수 결집을 꾀하는 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동하는 것이 두렵다. 현실에서의 정치참여에 가타부타 나의 의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자기주의와 사상에 대해 뭐라 하고 싶지도 않다.
뭐라 한들, 종교와 정치는 맹신의 올가미가 뚜렷하다. 청맹과니의 절반이 종교인이고 절반이 정치인이다. 보수냐 진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그게 어찌 하나님의 뜻을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있나? 부디 잠잠하기를.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무엇을 추구하는 것도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이쪽저쪽 모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 때 어찌 함부로 선두에 서서 상대를 저주하고 비방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일러, 주를 따르는 자면 어둠에 서지 않는다. 생명의 빛을 얻으라.
다른 쪽의 잘못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내 쪽의 것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그러니 자중함으로 주와 하나 되는 삶으로 살아야 옳았다. 저가 너무 미워도 저를 거기에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걸 알 때, 자중하게 된다. 주의 뜻을 살피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거기 두신 하나님의 참 뜻을 헤아려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그 농밀한 말씀을 주목하는 게 사랑이다. 나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으로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 23:16-17).”
늘 그처럼 황홀한 경지의 특별한 경험 가운데서 살고 싶으나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셨다. 나를 이끌어 일상으로 평범한 삶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이 승화다. 내 뜻과 내 의지를 앞세우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를 만족시키려고 할 때 기어이 그 축복은 변질된다. 건강한 육체와 적당한 지식과 직장과 물질과 삶의 안정이 나를 위해 소모될 때 이러한 복은 위험한 화근이 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부어주신 이의 뜻은 그것을 주의 이름으로 부어주는 삶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누가 말하는데, 자신들은 요즘 전원주택을 공동으로 구입하고, 그곳에다 전원주택 같은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노년에 뜻이 맞는 성도들과 텃밭을 일궈가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느라 열심히 돈을 벌고 그래서 몇 년까지는 아이들을 키우다가 애들이 몇 살쯤 장성하면 각자 은퇴하고 낙향할 것이라고 했다. 흘려들은 말이라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썩 바람직해보이지는 않았다.
참 그런 거 보면, 우린 누가 뭐라 한들 들을 게 아니라면 끝장을 봐야 성미가 풀린다. 그게 왜 나빠? 하고 물으면 도대체 할 말이 없다. 부어짐과 낭비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 누구에겐 부어짐이요 누구에겐 낭비됨이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4).” 그러나 주님은 달리 보셨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
내 것을 끝내 내 것이라고 여기는 한 별 수 없다. 나를 위해 쓰고 나의 만족을 채우는 데 사용하겠다는 데야 어쩌겠나? 자신의 삶을 깨뜨려 그 향유로 주의 향기를 퍼뜨린다는 건 그래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보다. 하게 하신 이가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문득 앞서 간 이의 고백이 떠오른다. 저들 부부는 마흔 중반에 은퇴하여 유유자적 사는 게 목표였다. 강원도 어디에다 일찌감치 땅을 봐두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저들 표현대로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으면서 모았다. 한데 그만 여자가 암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저의 하나님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어떻게 나한테 그러실 수 있죠? 저는 부인을 앞세우고 올 때마다 울었다. 울다 지쳐 어느 순간에 연락을 끊었다. 아, 눈물. 이 덧없음과 찬연함의 경계 앞에 누군들 뭐라 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자신을 채우려고 할 때 하물며 그것이 하소연이라 해도 덧없음이다. 얼마나 수시로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지 모른다. 교묘하게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세금 떼이듯 적당히 헌신하고 헌금하고 그 남은 걸 몽땅 자기 것으로 삼는 데는 어리석음이었다. 기어이 끝장을 봐야 끝날 이야기다. 뭐라 한들 들리지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주가 하신다. 우리의 눈물은 한계의 표시지만 주께 있어 눈물은 새로운 시작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는 순간 궁금하였다. 또는 전원교회를 꿈꾸던 그이는 여전히 거기 있는지도 궁금하였다. 하지만 따로 연락해보지는 않았다. 저의 이야기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거기까지였다.
오후께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에게 넌지시 주일을 권하였다. 글방을 하는 이유를 짧게 설명해주었다. 글쎄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나? 중 2가 되는 맞은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였다. 뭘 의미하는 걸까? 묻지는 않았다. 새로 아이가 오게 됐는데 지독한 난독증이다. 글자는 읽는데 그 내용을 모른다. 엄마와 둘이 산다는 걸 보니 대충 짐작이 되었다. 참 이상하다. 왜 하나님은 정상이 아니실까? 이상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으실까? 그저 나는 생각이 많았다. 일부러 더 그러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너무 힘들다. 안됐고 답답하다. 엄마들은 몰상식하고 아이들은 철이 없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시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가정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었다. 내 뜻과 내 의지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얄밉고 속상하고 때론 역겹다.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방치하듯 맡기고 나 몰라라 한다. 한 엄마는 하도 아이 성적을 운운하며 극성을 떨길래 보니까 열등의식으로 똘똘 뭉친 여편네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애한테 하는 걸 보면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다. 그러니 우린 한숨만 몰아쉬다 가정예배에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왜 그러지? 싶게 유난히 더 그런 아이들만 보내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참 이상하다.
내게 두시는 날들에서 그러므로 나는 더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 소리를 듣기 원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말이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4-35).” 그저 말씀만 붙들 뿐이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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