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0:19-2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말(言)이 넘쳐 그 말이 제풀에 꺾이지 않은 한 되풀이 되는 것은 자기변호뿐이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게 자기주장이고 이를 옹호하고 싶은 말은 현란하여 상대를 휘감는다. 말이 많은 것은 허물을 드러내고 입술을 제어하는 것이 지혜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한 그 가치는 매우 적다. 그러므로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이거야 원.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 4:24).”
유난히 말을 많이 해야 했다. 이어지는 말에 지쳤다. 오전에 성경공부를 왔다. 한 아이가 <가라사대>를 끝마치고 월요일에 입대를 하자, 그 아이 자리를 다른 아이로 채우시려는가. 설마 했는데 아이가 왔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당구를 쳤다. 힘에 부쳐 얼른 올라가 눕고 싶었는데, 아이가 따라왔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말이 시작됐다. 소화기능장애가 있었고 그것에 유난히 몰입하는 아이였다. 헌금을 거절했고 기도를 사양했다. 기도로 자신을 세뇌시키고 싶지 않았고 믿음이 가지 않는 이에게 헌금을 바친다는 게 불편해서였다. 하나님은 ‘없다’에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로 바뀌는데 긴 말이 필요했다. 듣고 답하다 열 시를 넘겨 돌아왔다. 그래서 확실히(?)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오늘 이 말씀을 붙든다. 나는 아이를 이성적으로 설득시킬 수 없다. 하필이면 실제 아이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지적으로 시작해서 영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아이가 성경공부를 원하는 데 따른 한 마디 정의였다. ‘자기를 옳다 여기는 우매함에서, 그 완고함을 깨고 주의 쓰임에 합당한 자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나의 각오였다.
그래 맞다. 구원은 쉽다. 우리가 이룬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주어지는 은혜의 것이다. 하지만 그 구원을 이루어 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순종을 요한다. 순종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사람은 없다. 죄의 속성은 우매함이고 우매함은 자기아집으로 완고한 것이다. 아이에게 순종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복종을 내세웠다. 어느 교수의 예가 생각났다. 안 돼! 하고 주인이 말했을 때 먹을 것 앞에서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꿈쩍하지 않고 있는 개의 동작이 복종이다.
그럼에도 기도하기. 그리고 묵상 글을 쓰기. 나는 아이에게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이해는커녕 납득하기 어렵다. 어찌 하나님을 논하여 알 수 있을까? 아이의 표현대로 탐구하고 싶다는 것인데 더더욱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을 바라자. 이는 기도뿐이다. 싫어도, 억지로라도 ‘주님’ 하고 부르자. 그것이 성경공부의 첫 준비 자세라고 일러주었다. 탐구는 학문의 영역이어서 지적인 출발이고, 내가 아는 기본 동작은 기도여야 영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를 조건으로 부탁하였다.
다음으로 글쓰기를 부탁한 것은 말이 갖는 허상 때문이었다. 말은 참 두서없어서 겅중거리기 일쑤고 그때마다 쓸려 다니는 연기 같다. 일순간 훅, 하고 끼쳐오다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여서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내가 한 말을 내가 금세 잊기 십상이고, 무슨 말을 하려다 이 말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은 즉흥적이고 단회적인 것이다. 물론 우리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말로 쏟아지는 것이지만 이를 조리 있게 풀어낸다는 건, 숙련된 자의 것은 늘 빤한 것이어서 감동이 적고 미숙한 자의 것은 순수하기는 하나 억지스러워서 피곤한 법이다.
갑자기 어느 날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쓰라는 게 아니고(그러느라 기진하여 다시 쓸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많다.) 매일 꾸준하게 반복하여 몇 줄이나마 조각글을 써보라는 것이다. 말은 감정을 타고 자신조차 속인다. 하지만 글은 선택한 어휘 안에 자신의 감정을 묶는다. 떠도는 생각에 집을 입히는 것이다. 것도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글이란 내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글쎄 모르겠다. 아이는 열한 시 반에 와서 하루를 꼬박 같이 있다 열 시를 넘겨 돌아갔다. 피곤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말이 충돌할 땐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소 귀에 경 읽기란 이런 것일 텐데, 앞으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5).” 말씀이 아니고는 대책이 없다. 내가 아일 어찌 설득하겠나? 떼쓰는 아이처럼 억지소리로 자기주장을 하는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를 아니라 한들 그렇다고 할 리 없고, 마치 ‘악성댓글’에 일일이 답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바울은 그렇게(그랬는데도) 만나주시면서 왜 나한테는(유년시절 그렇게 간절히 주를 찾았는데도) 침묵하시냐구요! 화가 단단히 났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한테 화가 난 거였다. 다 늦은 시간까지 왜 그처럼 온갖 말을 쏟아내게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오죽하니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아이와 변론해야 할까? 생각하였다. 본인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간절히 믿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하긴, 바울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저는 급진적으로 회심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4-6).” 그렇게 만나주신 하나님이 왜 자신은 외면하고 계시냐는 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아이의 간절함이라 여겼다. 주가 사랑하시는 부분이기도 할 거였다. 싫든 말든 말을 마치기 전에 나는 기도를 하자고 했다. 달리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말이다.
제자들 대부분의 회심은 점진적인 것이었다. 1차 회심은 그냥 말씀이 좋아서다. 새롭고 신기하니까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7).” 하지만 2차 회심은 본인의 고백에서 이루어진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8:29).” 지금 아이의 반항이 낯설지 않았다.
하나님은 보이는 문제보다 더 문제적이시다. 현실보다 가깝다. 아이의 항변보다 뚜렷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가 아니다.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 것이다. 왜 그처럼 건강문제에 억매여 있어야 하는지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아이의 언성은 높았고 공교롭게도 옆 사무실에는 사장 내외가 나와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저들이 숨 죽여 무슨 얘길 그렇게 열띠게 하나 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걸레를 들고 글방 앞 복도까지 서성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았고 되풀이 되는 항변을 늘어놓게 하였다. 이 모든 상황과 사실에 하나님이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3).” 현실을 초월하는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허리가 아팠고 피로감에 짓눌렸으며 헛도는 말에 지쳐갔다. 하나 분명한 건 이 시간, 이 모든 상황을 조성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의 항변이 고착된 부분을 알고 싶었다. 어디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멈춘 것일까?
병적으로 소화기능장애에 집착하는 아이에게 그것이 대수가 아니라 그 이면의 주의 뜻을, 그것으로 하나님을 더 바라고 구하던 마음으로 주의 뜻을 헤아려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본래 복음이란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좋은 소식이다. 이 복된 소식으로, 누구보다 복됨으로 받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흔히 우리가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요.’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에게도 말한 것처럼 순종이란 본래 우리가 감당할 수 있지 않다. 사람으로 사는 이상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지 섬김이란 거짓되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선명하게 주를 바란다는 건 지독한 위선자이거나 자기 확신에 빠진 바라새인과 같다.
아이의 회의는 그래서 소중하였다. 모처럼(?) 보기 드문 갈등이었다. 나름 치열한 분투가 값지게 여겨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순종을 위해 복종을 배우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란 본래 남의 옷을 입고 걷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홍포를 입고 거듭난 자의 길을 걷는다는 게 홀가분할 따름이라면 나는 그것이 더 회의적이다. 빛 앞에 설수록 어둠은 못견뎌한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견딜 수가 없어 비명이 튀어나온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이론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행여 나의 말들이 내 기준의 잣대를 드는 게 아니기를 기도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 말씀을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사모하면 할수록, 바라고 구는 일에 있어 복음의 지침이 되어주는 구절이다. 나의 어줍고 어버버한 말들이 문제될 건 없었다. 대신 죽으신 하나님이 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아이를 설득하거나 돌이켜 주 앞에 세우는 건 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같이 가는 것, 그러는 동안 곁에 있는 것, 그 자리에서 무던함으로 나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 비록 나를 제어하기 어려워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본능적으로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기다려! 안 돼! 하는 주인의 말에 따르는 것.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하신 이 말씀을 나는 신뢰한다. ‘억지로라도’ 나는 이 말을 다짐처럼 내 명찰로 삼는다. 말 그대로 ‘억지로라도’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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