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2 주일
잠언 5:1-14
두렵건대
5:1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5:2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5: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5:4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5:5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5:6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5:7 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5:8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5:9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5:10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5:11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5:12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5:13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5:14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
들어가는 말
영적인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순종은 사람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섬김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사람이다. 본디 순종이란 자기주장을 포기하는 것인데 이는 자아실현을 멈추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과 기준을 모두 맡기는 것이 순종이다. (개인적으로 달갑지 않은 적용이지만) 군인과 같은 경우다. 저에게 명령은 곧 법이다. 자기 의견을 내세워 그 주장을 견지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순종이란 모든 걸 내어드리는 일이다.
사람으로 아주 잠깐 순종을 경험하긴 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 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아이가 순진무구한 것은 자아를 실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어맡긴다. 그러면서 자아가 생기고, 이를 실현하고자 고단한 전쟁은 시작된다. 부모는 아이의 고집을 꺾기 위해 분투하고 아이는 자기 아집을 다스리는 일에 사투를 벌인다.
그러므로 순종은 복종을 통해 학습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두려워할 줄 알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복종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의지로 순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철저히 위선자이거나 지독히도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자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순종을 사모하는 자는 이와 같이 자신을 개탄스러워한다. 어떻게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치를 떤다.
오늘 지혜자는 그런 우리에게 근신과 지식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자신의 아집과 이를 동조하는 ‘음녀’로부터 멀리할 것을 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두렵건대’ 그 결과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일러 말씀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곧 다 이룬 줄 알았던 구원에 대하여, ‘설마’ 하는 방심이 모름지기 자기 신조와 철학에 대해 경계를 늦추는 것이다.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 받았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홀연히 데려가심을 당하여 더는 돌이킬 수조차 없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살아서 아직 이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우리의 오늘은 그래서 복되다. 산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는 날 동안 멈추지 않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다. 이내 자발적인 순종의 삶은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충만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곧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4).” 과연 내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할까? 그럴 수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통회하며 애통해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의 뜻대로 행할 수 있을까? 기꺼운 마음으로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럴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말씀 앞에 근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술에 말씀의 지식을 세워 결연히 지키는 것이다.
1. 근신을 지키며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1-2).”
근신은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는 추상적이지 않다. 막연하지 않으며 구호가 아니다. 실제다. 지독한 현실이다. 목적이 뚜렷할 때 스스로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을 억제한다. 마치 운동선수가 식단을 조절하고 철저히 정해진 시간을 따라 훈련을 하는 것과 같다. ‘케이팝스타’를 뽑는데 있어서도 어린 지망생들의 악전고투가 그 이유다. 목표가 있다. 이 땅에서의 삶으로 그 목적이 다하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할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물과 같고,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과 같다(마 13:44-46). 죽는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를 위해 근신한다.
성경은 일관되게 영생을 말한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리하여 복음은 예수를 말한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하나님께 더욱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서 살게 하신 그 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뚜렷한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근신한다. 운동선수도, 케이팝스타를 꿈꾸는 어린 가수들도 그처럼 근신하는데 하물며 영생을 사모하는 자의 삶이란 의당 마땅한 것 아닌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왜 굳이 근신을 따라야 하는지, 왜 내 입술을 말씀의 지식으로 지켜야 하는지, 알아야 앎으로 알아서 자신을 쳐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의식이 없는데 누가 열심을 다할까? 열심이란 지식에 대한 가치의 몸값이다. 우리에게 근신할 것과 입술을 지식으로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음녀’ 때문이다.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속성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노력이 음녀다. 이는 참으로 교묘하여 어찌 당해낼 재간이 없다. 스스로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마음은 입술의 꿀처럼 달고, 기름보다 미끄럽다. 유혹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린다. 정말 그래도 될 것 같다!
한데 오늘 본문은 이를 명확히 밝혀준다. 곧 ‘음녀’의 나중은 쑥 같이 쓰다. 입에 좋고 몸이 바라는 것인데 이내 영혼에는 쓰다. 또한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롭다. 적을 벨 줄 알았는데 자신을 벤다. 나날들과 하는 일이 평탄하지 않는데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 그리곤 체념한 듯 ‘다 그렇죠, 뭐!’, ‘인생 뭐 있어요?’ 한다. 일련의 사건사고들이 동일하다. 음녀는 그만큼 현실적이다. 너무 실제여서 괴기스럽지 않다. 합리적이고 설득적이다. 이치에 맞고 타당하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면 불편해진다. ‘그게 왜 나빠?’ 하고 우리 안에 반감이 든다. 인생이 참으로 얄궂은 것이어서 막장을 찍고 다 끝낸 나중에야 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⓵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롭다.
⓶ 그 걸음은 지옥으로 내려간다.
⓷ 사는 게 평탄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며 그 길이 든든하지 않은데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2. 말씀을 듣고 버리지 말며 그것으로 음녀의 집을 멀리하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7-8).”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말씀뿐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는 까닭은 말씀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목사 때문이고 가까이 지내던 성도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만 하나님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찬양하지만 하나님은 달갑지 않다.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러느니 혼자 누워 ‘너 때문이야’ 하고 침상을 맴돈다. 무엇에 실망한다는 건 자기허상에 속았다는 것이다. 이해와 상식을 바탕으로 그리 추측하고 동조했던 것으로부터 깨어나는 실망이다. 역설적이게도 실망은 실상을 보게 한다. 기어이 실망한 사람은 지기허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말씀을 의지하지 않을 때 사람을 따르게 돼 있다. 신념과 철학을 말씀을 대신해서 놓는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애굽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 원하지 하나님을 알고 싶지는 않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신다. 말씀을 버리지 말라는 것과 이로써 ‘음녀’의 집을 멀리하라는 것.
사실 ‘음녀의 집’은 결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 날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잠 7:16-21).” 어찌 거절할 방도가 있나? 이는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잠 7:9).” 모든 음녀는 은밀하다. 드러내어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
근신하라. 깨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어떤 일이 초래될까?
1) 두렵건대: 존영을 잃어버릴까…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9).” 우리의 신분과 영광을 잃어버릴까 두렵다. 우리는 본래 모든 만물의 주인이었다. 이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게 사명이었다. 다만 우리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었다. 가장 자유로울 때이다. 그런데 죄의 결과로 자신의 주인을 자신으로 모시면서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다. 그저 사는 데 쩔쩔매게 된 것이다. 정작 자신에 대해서만 주인행세를 하면서 말이다. 그 수한이 짧고 사는 날 동안 육신을 건사하는 게 일이다.
2) 두렵건대: 수고한 것을 잃을까…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10).”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애써 수고하여 남 좋은 일만 시킨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코빼기도 안 비친다. 그런 것이다.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 같지만 정작 돌아보면 모든 수고가 헛되었다.
3) 두렵건대: 후회하며 큰 악에 빠질까…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11-14).” 더는 어쩔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나오는 말
있는 것으로 감사하자.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15).” 괜한 열등감이 감사를 앗아간다. 죽어라 하고 애쓴들 그 수고가 헛되다.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16).” 하나님은 가장 선한 것으로 우리의 환경을 조성하신다. 때론 이해가 안 되고 뭔가 미덥지 않고 잘 모르겠더라도,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17).” 함부로 흘리지 말자.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이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18).”
어느 날 중늙은이 사내가 곰살맞지 않은 아내를 내쫓았다. 볼품없고 대수롭지 않은 시골여편네로 여겨서였다. 그리곤 장에 갔다 오는데 한 곱상한 아낙이 평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황망하여 어찌 오셨는가? 여쭙는데 그게 보니 제 아내였더란다. 늙은 아내는 집을 나서기 전에 곱게 단장을 하고 하직 인사를 하려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19).” 웃지 못 할 일이 세상에는 널렸다.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20).”
마무리 하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21).” 하나님 아닌 다른 무엇을 붙들고 산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22-23).” 부디 ‘두렵건대’ 근신하고 말씀으로 입술을 지키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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