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5 주일
잠언 7:6-22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7:6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7:7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7:8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7:9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7: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으니
7:11 이 여인은 떠들며 완악하며 그의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7:12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7:13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7:14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7:15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7:16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7:17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7: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7:19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7:20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 날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7:21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7: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들어가는 말
일찍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에덴은 오늘 우리에게 두신 환경이다. 일상이다. 사회다. 주어진 여건이며 상황이다. 첫째, 그것을 경작하라. 경작하다는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일이다. 땅이 아무리 비옥하다 해도 이를 경작하지 않으면 수확을 낼 수 없다. 돌을 고르고 골을 파서 물고랑을 내고 잡초를 걷어야 한다. 둘째는 그것을 지키라. 밭이랑을 따라 둔덕을 세우고 돌을 쌓아 경계를 이룬다. 날짐승의 출입은 물론 사람의 발길도 조심해야 한다. 아무나 드나드는 밭은 쓸모가 없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4-8).” 지키지 않을 때 길가 밭이 되고, 경작하지 않음으로 돌밭과 가시떨기 밭이 된다. 좋은 땅이라 하면 이를 지켜 경작하여 이룬 것이다.
오늘 잠언의 서두 부분을 보자. 간직하라. 지키라. 새기라.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1-3).” 왜 꼭 그래야 하나? 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하나님은 처음 살인자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다스리지 못할 때 다스림을 당한다. 무질서란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죄가 우리를 원한다. 오늘 본문은 이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지혜에게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4-5).” 지혜와 가까이함을 내 누이요 내 친족과 같이 어울려야 한다. 그것으로 성가시고 귀찮을 수 있다. 그래서 신경 쓰이고 공연한 데 매인 것처럼 불편하기도 하다. 이를 지키며 간직하며 마음에 새긴다는 일이 어디 홀가분한 일은 아니다.
어느 날 대저택 정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감탄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수와 잘 다듬어진 꽃길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려한 묘목에 놀라 탄성을 내지르며, 저마다 가지런히 자란 잔디 위에서 환호하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묵묵히 가지치기를 하던 정원사는 혼잣말을 되뇄다. 세상에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잡초와 엉겅퀴밖에 낼 수 없다는 걸 저들은 모르는군! 그 무질서함을 봤어야 말이지! 저절로 아름다운 정원이 어디 있다고 저리들 호들갑이람?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보다가
우리 일상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교훈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보이시는 계시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우리 이야기다. ‘내 이야기’로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다. 나름 저마다의 ‘내 집’이 있다. 이를 바울의 표현대로 한다면 ‘믿음의 분량대로’일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분량은 자라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래서 말씀을 상고하고, 이를 견주어 고찰하는 일은 복되다. 묵상과 성경공부를 권하는 건 그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저마다의 들창이든 살창이든 이를 통해 세상을 본다. 오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고이는 생각이, 원하는 소원이 곧 내가 바라고 보는 것을 특징한다.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건 그리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무엇을 보고 어떤 걸 느끼며 이를 어떻게 구사하고 사느냐, 하는 데서 됨됨이는 가름된다. 서두의 언급처럼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고 이를 지켜 살지 않으며 또한 지키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뚜렷하다. 그래 맞다. 모 아니면 도다. 선하지 않으면 악하다. 빛이 아니면 어둠이다. 구구절절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선호하지만 그 근본을 열어보면 다를 게 없다.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
지혜 없는 자의 특징은 어리석다. 어리석은 자는 게으르다. 게으른 자는 미련하고, 미련한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잠언에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언급이 17번, 미련한 자에 대한 언급이 65번, 게으른 자에 대한 언급이 16번 정도 나온다. 이는 모두 지혜와 상반된 특징을 다룬다. 여기서 오늘 본문은 젊은이를 언급시켜 다소 의아하다. 한데 지혜는 젊음이 갖는 고집과 아집과 무모함을 경계한다. 인생에 있어도 그 연륜이 쌓이면 젊은 날의 실수와 부질없음을 뚜렷하게 기억해낸다. 결국 기어이 나이가 들어서야 알 수 있는 지혜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를 통틀어 지키고, 간직하고, 새기지 않을 때 그럼 어떤 취약점이 따르는가?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가는데” 이는 기정 사실이다. 지혜가 빈자리에는 어김없이 어리석음과 미련함과 게으름이 채워지게 된다. 이에 따른 나른함은 음녀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것이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8-9).” 한 마디로 안이할 때 생겨난다. 저물 때,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조금 나른해질 때. 황혼 때, 깊어지기 직전 왠지 서글픈 생각에 뭔가 미진하다고 여겨질 때. 깊은 밤 흑암 중, 세상모르고 빠져 든 어느 어둠의 접점에서 결국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발적인 게 아니었다. 어쩌다 그리 된 실수도 아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8).” 저는 다분히 의식적이었다. 일부러 그리 한 것이다. 본래의 길, 거리를 지나서 갔다.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간 것이다. 모르고 그런 게 아니다. 알고 그리한 것이다. 모든 죄는 어쩔 수 없지 않다. ‘죄를 다스리라.’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18, 20).” 문맥적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모르고 그리 된 게 아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었다. 그러기를 힘을 더 받게 하려고 ‘수레 줄로 함 같이’ 여러 겹의 악을 도모한 것이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오늘 본문을 쭈욱 읽어보자. 간드러지는 여인이 환대한다. 어떤 때는 거리 어떤 때는 광장에서 우리를 안심시킨다. 다시 말해 그저 다들 그러는 것이다. 새삼스럽지 않다. 경계할 거 없다. 붙들고 입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리고 말하길,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14).” 하나님도 다 아신다. 주께 화목한 자로서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약속한 걸 이행했다는 소리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내가 할 도리를 다 했는데 그게 뭐 어떠냐는 것이다.
윤락여성이 그 일을 정당한 직업으로 대우받기를 요구한다. 동성애는 엄연한 자기권리라고 주장한다. 존엄한 이별을 선택할 수 있다며 안락사를 부추긴다. 곧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갚았노라.’ 그러니까 내 할 도리는 다 했다. 그러니 신(神)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리곤 다가와 ‘네 얼굴을 찾다가 만났도다.’ 설득력 있고 타당하다(15). 이어지는 구슬림은 횡재한듯하다.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16-18).” 이런 환대를 언제 받아봤던가!
운이 좋았다.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 날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19-21).” 오호, 통제라! 이를 마다할 재간이 없다.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22).” 이럼 안 되는데, 하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그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23).”
나오는 말
말씀은 우릴 붙든다.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24).” 그리고 다시 환기시킨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25).” 그 결과는 불을 본 듯 빤하기 때문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26).” 그러므로 어쩔 것인가?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27).”
말씀은 다시 우리를 이끌어 말씀 앞에 세운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8-9).” 한 마디로 우리가 안이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난다. 저물 때는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조금 나른해질 때, 그래도 될 것 같은 때이다. 황혼 때는 깊어지기 직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고 뭔가 미진한 것 같다고 여겨질 때이다. 이렇게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러그러한 멜랑꼴리다. 깊은 밤 흑암 중은 세상모르고 빠져 든 어느 어둠의 접점에서다. 설마, 하는 순간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결국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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