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9 주일
잠언 6:1-2
~을 위하여, ~하였으면
6: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들어가는 말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잠 22:26).”
조금은 인색하게 들린다. 서로 손 잡고 더불어 보증이 되며 담보가 되어주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다운데 말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웃을 위하여’ 또는 ‘타인을 위하여’ 담보하고 보증이 되는 일은 서로 얽히고, 그 말로 인해 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표적인 관계가 가족이다. 그리고 잘 아는, 친하다고 여기는 순서대로 우리는 더욱 ‘~을 위하여, ~을 한다.’
보증과 담보는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내가 책임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함축하는 의미는 ‘나만 믿어’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 하고 따끔하게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고마움은 잠깐이고 그 책임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 다들 제 코가 석 자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게 사람이다. 한데 마치 서로가 가까울수록 스스로 담보가 되고 보증이 돼야 할 것 같다. 이를 의무라 여겨 당위를 부여하고 이를 악물고 갚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26).”
그래도 좀 야박한 것 같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게 말이다. 그리하여 ‘무엇을 위하여’에 얽힌 사연은 항상 구구하다. 자식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그래놓고는 항변한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항상 우리의 ‘~을 위하여’는 ‘~을 하였다’는 데 초점을 둔다.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는 정작 하나님 앞에 가서도 이어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다시 말해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내가 목사가 되고 교회에 헌신 했으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소리다.
1. ‘지나치게’, ‘~을 위하여’ 하지 말자.
앞서 솔로몬의 다른 진술을 주목해보자.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불공평한 현상인가? 대체 이를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이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의 다음 주장은 다소 염세적으로까지 들린다. 그러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6-18).”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단서는 ‘지나치게’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문맥적으로는 회색주의적인 삶을 살라고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를 돕는 구절이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16:25).” 그럼 그 옳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 권위가 마땅히 하나님께 있음을 주목한다. ‘지나치게’는 우리의 판단과 기준으로의 숱한 도모다.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는 일에 있어 전적인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 외의 모든 것은 허무할 따름이다.
2. 우리의 보증은 주님께만 있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119:112).” 나의 보증은 주님께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무엇으로 누구의 보증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옳지 않다. 사람 관계란 본래 좋을 때나 좋은 것이다. 저의 보증은 후에는 반드시 얽힐 뿐이다. 맹인이 맹인의 길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인이 죄인의 죄를 보증할 수는 없다. 오직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저마다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 같지만, 것도 다 좋을 때나 그렇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살인-자살도 서슴지 않는다. 하물며 부모가? 자식이? 건 다 그리 위하는 마음일 뿐이고, 정작 곤고한 날에는 자신이 우선이며 자신도 극에 달하면 포기한다. 그런 우리를 본래의 사람, 죄가 없던 처음 사람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인자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대체 그럼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것일까?
첫째, 속량 때문이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다. 구원은 주께만 있다. 그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누구도 서로를 위해 담보나 보증이 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의 속량하심에 동의할 뿐이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사람의 제일 목적이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둘째, 약속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셨다. 그 이면에 더 좋고 좋은 약속의 기업이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이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게 성경의 목표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19-22).”
셋째, 이를 위해 실패와 좌절을 허락하신다.
낙심과 실망도 더하신다. 하나님은 우릴 당혹스럽게 하신다. 난감함을 통해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순탄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뭐 굳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어야만 하나?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해야 했을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어리석고 한심한 게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3. 결국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잠 16:26).” 같은 맥락에서 읽어보자. 무엇이 우리를 그처럼 고되게 일하게 하는지. 왜 그처럼 수고하고 애쓰며 살게 하는지. 이내 사는 날 동안 왜 우리는 그리 고달프기만 한 것인지. 정작 그것이 하나님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의 고집 때문인지. 그리하여 우리 입이 이를 재촉하는 것은 무언인지! 성취감, 자아실현, 남들보다 나은 삶. 곧 그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오늘도 우린 모진 수고를 감내하고 사는 게 아니던가?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해 강구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3).”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이를 인정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짓의 기본은 감추는 것이고 악의 근본은 남을 탓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의 도우심이 간절하다.
둘째, 결코 긴장을 풀지 말라는 것.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4).” 이는 곧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2).” 하는 지난 주일의 말씀이 그것이다. 하다못해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의식하고 식단을 고르고 절제하며 먹을 것을 선별하여 취하는데, 하물며….
셋째, 정작 무엇을 위해 수고해야 하는지를 알라는 것.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5).”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린 이에 동의하고 그것은 감사로 참여함으로 성사된다. 하나님도 이를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으신다.
나오는 말
주를 경외함이란,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는 주가 주시는 근심이다. 곧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악하여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주 앞에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온전한 사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데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사람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자가 되게 하기 위하심이었다.
이에 우리 안에 근심을 두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곧 이 근심은 경외함으로 우리를 성화시킨다.
※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의 특징
ⓐ 간절하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 변증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 분개한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11:20).”
ⓓ 두렵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눅 10:13).”
ⓔ 사모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32).”
ⓕ 열심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3-4).”
ⓖ 벌한다(근신하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2:21).”
그리하여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궁극적으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바로 그, ‘온전한 사람’이 무엇이관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왜 우리가 서로의 담보나 보증이 되어서는 안 되는지, 이는 악하고 추한 죄의 위장할 뿐이었음을 일깨우신다.
‘~을 위하여 /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가 ‘~을 한다면 / 담보와 보증을 한다면’ 우리는 멈춰야 한다. 이는 주께서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만 담보와 보증이 되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은 우리 스스로의 담보와 보증에 대하여는 주가 미워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우리 스스로의 ‘담보와 보증’은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한 눈’과 이를 확신케 하는 ‘거짓된 혀’와 이를 도모하기 위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하나님보다 나은 길을 찾고자 하는 ‘악한 계교’와 이에 ‘꾀를 내는 마음’과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가졌다. 이로써 우린 숱한 주변의 동조자들을 찾아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망령된 증인’이 되고, 이를 통해 ‘서로를 이간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를 다 알지만, 이를 제어할 수 없어서, 근심이 우리에게 사무치게 하자. 근심으로 주 앞에 엎드리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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