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03122 주일
잠언 8:1-2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8: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8: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8: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8: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8: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8: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
8: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8: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8: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8: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8: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8: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8:20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들어가는 말
지혜는 사람의 이해가 생겨나기 전의 곳에 있었다. 지식은 철학을 발판으로 축적되는 것이라면 지혜는 본래에 있던 곳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대통령 탄핵 심판이 이뤄지기 몇 시간 전에 쓰고 있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 ‘초유의 사건’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작금의 현실보다 더 끔찍하고 황당하고 초라했던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고, 물론 당면한 시대에 저들에게 있어서는 모두 초유의 사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반박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그리고 오늘 본문은 지혜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그 지혜가 우릴 부른다. 매시대마다 그 길목 길목에서 소리를 높인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1).” 일련의 사태를 목격하면서도 배우는 게 없다면,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2-4).” 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창 19:12).”
다급하게 이끈다. 하지만 우리의 학습된 무기력은 농담으로 듣는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 풀려났음에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개들을 철창에 묶고 일정한 간격으로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런 뒤 묶였던 끈을 풀어주고 다시 전기충격을 가했다. 이제는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데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개들은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학습된 것이다. 설마, 하는 것이다. 농담이 그런 것이다. 웃자고 든다. 허탈하게 웃고 만다. 허허실실 그게 속편하다고 여긴다.
지혜자는 일러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이를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 1:27).” 하셨다. 이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 11:9-10).” 성경은 이른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듣지 못하는 건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말이 많은 것이다. 다들 할 말이 많은 가운데 산다. 아이엄마는 아이에 대한 자기 사랑을 역설하느라 정신이 없다. ‘널 위해서’를 외치며 자신의 희생만을 강조한다. 그것이 아이에겐 사랑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참견이며 공연한 트집이 된다. 서로는 반목하고 갈등한다. 왜냐하면 자기 할 말만 하고 정작 상대의 마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첫째, 명철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철하다는 것은 사리가 밝은 것이다. 사리에 밝다는 건 그릇된 이치나 생각을 아는 일이다. 이에 분별할 줄 안다. 결국 분별하지 못하고 이삭은 축복하였다.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창 27:23).” 그로 인해 형제의 반목은 야기됐다. 바울은 일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즉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준이 애매하면 갈등도 다양하다.
둘째, 미련하여서다.
미련하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데 터무니없다는 걸 알지 못하니까 미련한 것이고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허황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간단한 진리를 부정할 때 수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가설과 주장과 그에 따른 연구와 학설이 난무할 따름이다.
이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묘사하고 있는 여섯 개의 혹성에서 만난 여섯 사람의 특징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혹성에는 저 혼자 있으면서 명령을 내리는 임금이 있었다. 두 번째 별에 사는 허영꾼은 자기 지식을 뽐내려 할 뿐이다. 세 번째 별에서 만난 술주정꾼은 술이 깨면 창피할까봐 도로 술에 취한다. 네 번째 혹성에서의 상인은 별을 세며 그 별을 따다 이문을 남길 생각으로 들떠 있다. 다섯 번째 별에는 가로등을 껐다 켰다하는 자의 맹랑한 수고가 그려졌다. 그리고 여섯 번째 혹성에서 만난 지리학자는 자신이 가보지도 못한 곳을 연구하느라 서재에 틀어박혀 늙어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5).” 명철하고 마음이 밝기 위해서는 우선 들어야 한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6).” 그러므로 우리의 선하지 못함과 정직하지 못함을 마주하는 정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두가 이를 회피하고 외면함으로써 묶인 게 풀렸는데도 고통가운데 있으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에 지혜는 단호하다.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7).” 곧 지혜는 첫째, 그 입의 말이 다 의롭다. 둘째, 그러므로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다.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8).” 이를 아는 게 지혜다. “이는 다 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니라(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좌우정렬 하고 외칠 때 그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오락가락하게 돼 있다. 어떠하든 기준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데 지식은 새로운 지식의 등장으로 소멸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누누이 강조하기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한 문장 안에 신앙의 모든 기준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어디에도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를 대단히 높이 여긴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하던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누구랄 것 없이 저마다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확신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가게 하였다. 작정하고 결심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오만함이다. 실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도 실은 자신을 부인할 때 새 힘을 얻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
이를 오늘 말씀은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10).”고 한다. 곧 당장의 이문에 열을 올리지 말라는 소리다. 훈계나 지식은 너무 막연하다. 가시적인 결과를 얻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속성을 선호한다. 학원마다 이를 자랑으로 내세운다. 요약본을 돌리고 간추려 요점을 열거한다. 실제 서울대학교에서 재미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많은 대다수의 신입생들이 학원을 의존했고 성적도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입학 후 그런 학생들의 경우 자발적인 학습참여에서 현저히 떨어졌다. 오히려 학원을 다니지 않은 그룹이 창의력이 높았고 졸업 후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11).” 이를 깨달아 알기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막연하지 않다. 이상적인 글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실 때는 못 따를 것을 빤히 알고 하신 소리가 아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에 분명한 것은 기준이다. 푯대를 정함으로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나오는 말
곧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2-13).”
첫째, 명철로 주소를 삼았다. 둘째,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었다. 이 둘은 지혜의 특징이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불의한 자의 승승장구함이 자신을 미끄러지고 넘어지게 한다고 하였다. 나름 선을 다하며 산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의 출세와 성공이 너무 불공평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저들의 잘됨을 보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실의와 낙심에 들 만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곧 지혜가 머무는 곳은 주의 성전이다. 말씀이다. 우리 영혼의 주소다. 이를 위해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지식과 근신’이 표지판이 되어준다. 그 구체적인 알림은 셋째, 악을 미워하는 것이고, 넷째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는 것이다.
지혜는 결코 막연하지 않다.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20-21).” 지혜는 창세 전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도 있었다. 이 모든 게 생기기 전에 있었고 세워지기 전에도 있었다.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26).” 그러므로 지혜는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두시는 주의 생기가 곧 생령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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