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전봉석 2017. 2. 20. 07:36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언 20:24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9:12

 

 

 

조금 늦게라도 아이가 왔다. 피곤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설교 중에 연신 졸고 있었다. 안쓰러워서 뭐라 하지는 못했다. 예배를 마치자 점심도 못 먹고 부리나케 돌아가야 했다. 모처럼 가족들과 점심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기특하고 고마운데 왠지 미안했다. 외조카아이는 유난히 우울해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올까말까 망설이느라 늦었다고 하였다. 나는 뭐라 해줄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아내는 혼자 애쓰는 듯 부산하였다. 오후에도 내내 그 수고가 불편하였다.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신경만 쓰였다.

 

미안하고 안 됐고 불편한 마음이 괜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서 나 놀라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마음만 쓰였다. 다들 돌아가고 혼자 남아 휑한 마음이었다. 엄밀하게 내가 나의 마음을 몫으로 하듯 다들 자기 마음으로 몫으로 안고 주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그 일’에 집중하다보면 과도한 의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아내라는 자리, 성도라는 직분,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의무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마땅함이 무게감으로 짓누르는 게 되면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모든 관계는 그러하다. 분별하지 못하면 애착만 남는다. 사랑을 빙자한 의무감만 또렷해진다. 마르다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저들이 마르다 같구나, 생각하다 그게 나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내가 괜히 더 수고하고 애쓰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공연히 미안하고 죄스러울 때도 있다. 주님은 어느 게 더 옳고 그름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이 좋은 편’을 택한 데 따른 마리아의 집중을 말씀하신다.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께 집중하는 것과 주를 위한 일에 집중하는 것은 다르다. 그 일이 귀한 건 그 일의 대상이 값지기 때문이고, 그 대상을 바로 알 때 그 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마음이 쓰이는 건 그 마음으로 더욱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기도할 일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려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가령 늘 피곤에 겨워 주일 예배에 늦는 걸 감안해서 그 시간을 30분 늦출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혹은 예배가 끝나고 다들 재미없게 그냥 돌아가는 것 같아 어떤 재미난 일을 도모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는데, 마음이 쓰인다고 내가 나설 수 있는 게 아닌 것도 있는 거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각자 저들만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닌 것도 있다. 일일이 마음 쓰고 챙기고 대신하려 드는 마음은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다. 애착과 사랑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나의 불편함 때문에 대신하려드는 수고는 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론 이와 같은 생각이 더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래놓고는 ‘너 때문이야’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주일 날, 언제쯤 하나님만 바라며 예배에 참여할 수 있을까? 여느 날 아침과 달리 1시간은 족히 부산을 떠는 것도 마치 손님을 맞는 사람처럼 군다. 청소를 하고, 성경과 주보와 원고를 자리에마다 정돈하고, 커피를 내리고, 물을 끓이고… 그러다보면 설교 원고를 한 번 더 볼 시간도 없고, 예배에 앞서 기도로 마주할 수 있는 겨를도 없다. 뒤미처 누가 오면 아는 체 해야 하고, 일일이 챙겨 말을 거들어야 한다. 때론 그러다 얼결에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구 때문이 아니다. ‘널 위하여’란 마음이 가시지 않는 이상 ‘나만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이 스스로를 억울하게 하는 법이다. 아니면 공연한 미안함에 시달리거나! 둘 다 같은 맥락의 마음이겠다. 결국은 하나님만 바라는 게 아니어서 말이다. 그 일에 집중하느라 정작 외면하게 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곧 주의 은혜를 바라느라 주를 바라지 않는다든가,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느라 주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든가. 이 큰 차이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을 위한 종교’ 정도에서의 신앙일 거였다.

 

누가 알까? 저 아이가 왜 나오나… 싶은 게 벌써 수년이다. 내 입장에서는 언제 그만둘지 모르겠구나! 싶은 게 그렇다. 왜 여기까지 오나, 싶은. 왜 나와 같이 사나, 하는. 이러한 생각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건 결국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과도한 의무감 때문이다. 마르다처럼, 그 일에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은 ‘널 위해 무엇을 하는 나의 수고’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나아가 ‘내가 어떻게 했는데’ 싶은 것이다. 흔히 ‘뭘 더 어쩌란 말이야?’ 하는 항변은 그래서 선하지 못하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 이는 저를 위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다음 말씀이 정답을 이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하나님만 아시면 되는, 온전히 주께만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말이 쉽지 어디 쉬운가? 그럴 수 없어서 더욱 주를 바라고 구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였다. 성경은 결코 이론이 아니다.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어디 온전하기만 하였던가? 때론 너무하다 싶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이내 주를 바라는 자리에 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내 길을 어찌 해보려고 할 때 어그러지는 건 당연하다. 내 길을 주께 맡길 때 바른 길을 가게 된다. 곧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이와 같은 말씀이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나의 어리석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이것까지도 주께 의탁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하려고 할 때 마르다처럼 괜히 고달프고 고단하여 억울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기어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자기애가 문제였다. 당장은 그게 위로가 되고 격려도 되는 것 같지만 필시 당위적인 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너는 내게 그러면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등식이다.

 

이것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었다. 이와 같은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한데 이를 기어이 어겨 그래도 너만은 알아줘야 한다고 할 때, 서러움은 자명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아이들을 의식하고, 신경 쓰고, 마음 졸이는 게 문제였다. 마치 하나님보다 더 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게 실은 나를 못살게 구는 마음이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렇구나! 그게 결국은 날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더 고달프니까. 자기 나름 애쓰고 수고하느라, 정작 ‘이 좋은 편’의 것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을 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왜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던히 ‘그냥 그리하는 게’ 값진 거였다. 묵묵한 일상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두신 한 날의 수고에 족한 것이다. 그게 벅찬 것은 자꾸 남과 견주려하거나 저를 의식하여 저에게 더 잘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설령 예배 시간을 11시 반으로 늦춘들? 뭔가 즐거운 일을 도모한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한들? 고작 주의 일이 나의 보람을 느끼려는 것은 아닐 텐데, 첫째도 하나님이고 둘째도 하나님이다. 첫째도 말씀이고 둘째도 말씀이다. 누군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 20:9).”

 

하여 나는 주께 아뢴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하나님을 미뤄두는 게 죄였음을. 마치 내가 저들에게 서비스 봉사하는 사람으로 여겨 애쓰는 게 헌신인 줄 알았던 게 고의로 죄를 짓는 거였다. 몰랐다고 할 수 없는 게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한 게 아니던가? 나를 위로하는 게 나의 수고에 대한 결실이어서야 쓰겠나! 그렇게 치자면 결국 이 땅에서의 종교면 족한 것을.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사야 42: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