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언 21:25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20:7
생각은 많은데 추구하려 하지 않고 바라는 건 많은데 의지가 없으며 말은 많은데 행함이 따르지 않을 때, 자신은 물론 곁에 있는 사람도 멍든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신을 죽인다. 그러면서 늘 바라길 누구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저의 수고와 인내는 보지 않고 그의 영광만 부러워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이에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전 4:5-6).”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무 일 없다는 게 우리들로 하여금 병들게 한다. 안이함은 곰팡이처럼 번져서 어느새 곁에 있는 사람까지 그러려니 하게 만든다. 비록 모자라도 그것으로 충실할 수 있는 게 복이다. 그럴 수 있기를, 누구에게 바랄 게 아니라 내 자신이 그러하기를. 혼자 있는 시간이 때론 무료하게 흘러가는 것이어서 아찔하다.
오후 내내 빈둥거리듯 나른하였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불편하였다. <컨택트>를 보다 지루하여서 끊었다. 누워서 책을 읽었다. 주인이 없는 사무실에 에어컨 설치 기사가 와서 작업을 했다. 좁은 천장을 기어서 복잡한 선들을 배치하느라 땀을 비 오듯이 쏟았다. 가지고 있는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저의 순한 얼굴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몸을 쓰고 일을 하는 게 그래서 정직하였다. 생각으로 피둥피둥 살찐 나의 영혼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마치 무료함을 달래듯 책을 읽는 게 말이다.
오늘 날 우리의 한계는 나른한 거였다. 별로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안이함이 그것이었다. 그래놓고는 남의 일에 그처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다. 자식이라서 혹은 늘 곁에 있는 사람이라 더 눈에 띄는 어떤 흠결을 마치 나는 안 그런 것처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쯧쯧, 혀를 차며 뒷짐 지는 것도 꼴불견이다. 우매자는 팔짱 끼고 있으면서 자기만 축낸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당장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8).” 한껏 애써 부지런을 떠는 사람도 하등 다를 게 없다. 보면 유난을 떠는 경우가 무기력한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 극한 봉사나 헌신을 자처하는 인물 치고 자기 안에 풀리지 않은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곧 개인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누군 너무 부지런을 떨고 누군 너무 무료함에 빠진다.
결국 우리의 됨됨이가 그런가보다. 미련하여서 죄의 속성이란 게 본래 고난이 오기 전까지는 꿈쩍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하면 안 되고 우린 어쩌면 이 모양일까? 해야 한다. 죄를 한탄할 때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시를 두시지 않았다. 고난, 슬픔, 낙심과 좌절을 작정하신 적이 없다. 죄로 인한 그것으로 하나님은 다만 섭리가운데 허용하시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란 그처럼 무겁다.
자유의지를 운운하는 치는 자신의 의지에 눌려 신음하며 살게 돼 있다. 별 수 없는가보다. 이내 주 앞에 호소하며 그의 긍휼하심을 바라던가, 더욱 강퍅하여져서 스스로 완고함을 붙들던가. 나 역시 다를 게 없어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힌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주만 바랄지라.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그러하기를. 그러므로 주 앞에 선명할 수 있었으면. 마음은 저 혼자 꾸물거려도,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4).”
그러므로 함께 함이 더 낫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이처럼 내 안에 주를 바라며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뢸 수 있는 양심이 있다는 데 감사하였다. 땀에 흠뻑 젖고 먼지를 듬뿍 묻히고서도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에어컨 기사의 노고 앞에 감동하였다. 기질적으로 선한 자이거나 주를 믿고 의지함으로 성실한 자일 거였다.
이처럼 괜히 배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섬뜩하여 경계가 되는 사람도 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게 의도하여 그리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닐 거였다. 주를 바람으로 그 소원하는 바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복되었다. 그러므로 주실 날들을 성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있든 없든, 보든 안보든, 주님과 나의 관계다. 마음이 닿는 곳은 언제나 소망하는 그 이상의 자리여야 한다.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되는 게 때론 놀랍기도 하다. 어디 출근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나는 아홉 시 전에 글방에 간다.
되풀이 되는 일상 같지만 매순간이 새롭다. 우선은 읽고 있는 책과 그 저자의 안내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새롭게 다지면서 하루하루에 적용하는 게 그러하다. 대체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천 년의 갑절을 산들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나게 돼 있다. 그럼 죽어서 가져갈 게 무엇일까? 돈? 명예? 나름의 가치? 혹은 자식들의 평안함? 출세? 성공? 글쎄… 죽어보지 않은 자의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만 각자의 성품이다. 우린 죽어도 각자의 성품을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느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성품은 자라는 것이고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다.
이를 수 없고, 내 수고와 노력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어, 이를 앎으로 주님의 팔복을 되뇌며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죽어서도 주 앞에 가져가야 하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신중하고 또 가치 있는 추구가 어디 있을까? 그저 사는 게 목적이라면 개돼지처럼 산들 그게 뭐 대수일까? 그러므로 가장 고귀한 집중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사는 날 동안 연연해하며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이다. 뭐 대단히 희생하고 사랑하는 양 굴지만 것도 가만히 보면 자기만족에 겨운 것이었다. 사람이란,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전 6:3-5).”
인생의 덧없음이여. 내 안에 이는 불편함에 대하여 그것으로도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게 하시는 주의 섭리가 있었다. 왜 어려운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만을 위해 살다 나만을 위해 죽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 전에 알던 내가 아니다. 전혀 별개의 나다. 이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8-19).”
그러므로 가장 가치 있는 날은 하나님과 화목한 날이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아내와도 자식과도 나아가 이웃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도 화목할 수 있다.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더욱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선이었다. 아내의 기분을 살피느라 혹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염려하느라 하나님과 소원해지는 것은 어리석었다. 고로 내가 나를 무료하게 여기는 오늘 날의 염병 앞에서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 말씀을 바람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114).” 기승전, 말씀이다.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모른다. 저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해본들(시 73편, 욥 21:7-16) 나는 그저 미끄러지고 넘어질 뿐이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저들은 만고에 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천 년을 갑절로 산다 한들, 그것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채 죽느니, 어느 집 대문에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연명하면서도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복되었다.
말씀은 분명하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 21:30).” 그러니 어쩔 것인가? 순복하든가 이내 엇나가든가,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31).” 결국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8).” 그 차이는 우리에겐 견고한 의뢰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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