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전봉석 2017. 2. 22. 07:42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잠언 22:11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이에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17-18).” 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오래 머금어본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다.’ 이게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닌 것을 잘 안다. 아이처럼 순진할 수는 없다. 어른이 되어서도 순진하다는 건 미숙하다는 쪽에 가깝다. 성숙한 자는 순수함을 사모함으로 이를 위해 다툰다. 자기 안에서 이는 온갖 욕구와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성결이었다. 그 뒤엔 성령이 계신다.

 

결국 이를 위해서도 말씀을 곁에 두고 이 지식에 마음을 두는 삶이어야 한다.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12).” 사악하다는 건 한사코 주를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로 말씀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다. 그럴 시간에 좀 더 자아를 실현하는 게 현명하다고 여긴다. 이 지식은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아는 농부 같고, 귀한 진주를 발견한 진주장수 같다.

 

이와 같은 지혜를 성령이 아니시면 누가 우리 마음에 두실 수 있을까? 그런 자는 자녀로 인해 옳다함을 얻는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 그 사는 모습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뭘 더 가르칠 게 있겠나! 저는 비판하지 않으며,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나누어 준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7-38).”

 

그런 자의 입에는 바른 찬송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이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안다. 주의 능력으로 주가 높임을 받으심을. 행여 나의 수고와 노력이 앞세워지지 않고, 다만 그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할 따름이다.

 

누가복음 8잘 22절로 25절을 말씀을 읽다 그 섭리의 깊고 놀라운 사실 앞에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주의 명령을 따라 호수 저편으로 건너간다. 주님도 함께 계신다. 한데 이 무슨 고생인가? 순탄하여 일이 술술 풀려도 시원찮은데, 광풍이 일어 호수를 내리친다. 괜한 걸음을 했나 싶다.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의기소침해지고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심정으로, 모세의 우울감에 시달린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때로는 일부러 더 그러시는 것 같다.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할 것인데, 이제 온전히 주만 향하여 나의 생의 전부를 드릴 것인데,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뿐인데 어찌 더 어려움이 닥치는 것일까? 실은 내가 주를 위해, 주만 바라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래서 잘 풀리고 잘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라면 이게 그릇된 것이다. 사는 데 따른 수단의 하나로 주를 바라고 구하는 사명감이라면 이게 선하지 않은 것이다. 가만히 마음에 두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볼 때 결코 내가 순수하지 못했다, 하는 데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나는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가 드려지면서 모든 수입은 교회 재정으로 삼기로 하였다. 돈 없이 사는 것으로 전부가 주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실제 나는 늘 돈이 없다. 그 필요가 일정한 동선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사용하는 카드는 그래서 교회 재정에 따른다. 누가 와 식사를 대접하거나 어떤 물품을 사거나 할 때도 모든 게 그렇다고 여긴다. 사실 그러면 좀 더 나을까 하여, 하나님이 더 채워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나의 꼼수 같은 꼼수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말 그대로 그럼 주시는 이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돈이 없으니 돈에서 자유로워졌다. 넉넉하게 부어주시지는 않았지만 모자람이 없게도 하셨다. 곁에서 아내가 힘들어하고 자식이 고달프고 나아가 다들 돈 때문에 쩔쩔매는데도 나는 늘 예외로 두시는 것을 느낀다. 교회에 전념하기를, 행여 수입에 연연할 때 말씀도 기도도 변질되는 건 시간문제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성도의 물질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때로 시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참새보다 귀한 존재다.

 

호수 건너편에 당도했다. 뭔가 마땅한 무엇이 기다릴 줄 알았다. 일에 보람은 주어진 일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한데 ‘귀신들린 자’라니! 명령에 따랐고, 주님이 함께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광풍이 몹시 일더니, 이 무슨 조화인지. 저는 옷도 입지 않았고,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자였다. 저의 안에는 수많은 귀신이 들림으로 그 이름을 군대라고 하였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6-27).”

 

주와 동행하는 데 있어, 여지없이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신다. 이럼 좀 나아질까, 하여 주의 이름을 빙자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릇됨을 확인시켜주신다. 순수한 마음으로 온전히 주만 바란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알게 하신다. 내 힘과 내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 앞에 무릎 꿇게 하신다. 우리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이 한 사실을 마주하는 데 있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낙천적인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변질된 것이기 때문이다. 무난하고 순탄할 때야 누군들 순교라도 못할까? 닥쳐봐야 아는 것이다. 기어이 박살이 나봐야 내가 얼마나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얼마나 교묘하게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사는 데 따른 수단으로 종교를 택했고, 이를 좀 더 윤택하게 하고자 하여 말씀을 의지하려 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필요로 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적인 마음이 귀신 들린 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나였다는 것을 말이다. 저는 오래 옷을 입지 않았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7).” 이는 마치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상의 소소한 일에는 무관해도 되는 것처럼 군다. 의복은 더불어 사는 데 따른 필수요건이다. 이를 거부한 것은 자신만 홀가분하면 될 줄 아는 것이다. 그 삶이 자신만 변화산에 있는 것처럼 황홀해하는 것이다.

 

또한 저는 집에 거하지 않았다. 의무를 다하지 않고, 무리에서 떨어져 있어야 거룩인 줄 아는 경향이 우리에겐 있다. 평범함을 왠지 악하게 여겨 남다른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의 땅에 살지 못하고 무덤 사이에 거한다. 죽은 자의 사상과 철학과 저들의 삶의 족적을 어루만지며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것이다. 이런, 그러고 보니 이게 오늘의 내가 아니던가? 흔히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이의 공통적인 남다름이 아니던가?

 

주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새로운 사역지로 옮기시면서 가장 우리와 닮은 이를 먼저 마주하게 하신다. 앞서 그 일에 함몰되지 않게 하려 곁에 있으시며 함께 광풍에 시달리게 하신다. 현실은 늘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술 들어가듯 신앙을 갖는다. 믿음을 수단으로 삼는다. 기도를 조건으로 내걸고 명분을 들이밀며 하나님께 청구하듯 당당하게 구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요? 충분히 축복할만하지요? 우리 길을 평탄하게 해야 맞지요?

 

그랬었다. 가까운 예로 군포에서 인천으로 글방이 옮겨오면서 나는 전적으로 저 말씀대로였다. 주의 이름으로 주의 교회를 이루는 일인데도 지지고 볶고 안달복달 그렇게 아내와 싸우고 나 자신과 씨름하였다. 만사가 귀찮고 어렵고 그러니 하는 족족마다 마뜩치 않아했다. 간신히 육지에 내리는가 싶었는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득시글거리며 자기 요구를 해대고 있었다. 다 안다. 누구보다 주를 더 잘 안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28).” 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고스란히 내 기도와 닮았다. 결국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얘가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나를 내버려두십시오. 여기가 좋사오니, 내가 그냥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겠습니다. 그랬었구나! 기어이 내 안에 숱한 나를 몰아내어 먹성 좋은 자기 아집과 교만과 더러운 몸짓으로 살찌운 돼지 떼에게로 버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3월이면 일 년이 되었다. 지난 나의 시간이 아침에 소리 내어 읽던 말씀에 담겨 있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별 거 아닐 줄 알았던 일에 나는 송두리째 벌거벗겨졌다.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건, 그 마음에 정결을 사모하는 일이었다. 이내 그 입술에 덕이 있음으로 임금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2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