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전봉석 2017. 2. 23. 07:28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언 23: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편 22:26

 

 

 

주께 향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만 바라고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럼 또 뭔가, 그랬으니까 날 더 잘 봐주시겠지? 하는 마음은 은근하게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 아니던가? 갑자기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자 훅, 하고 올라왔다. 십여 분 전에 미리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여의치가 않았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눈을 피해 한 알을 더 삼키고 한참을 서성거리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왜 이러는 걸까? 대체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얼까? 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몰라주시는 걸까?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 내 안의 염려와 근심은 때로 내 주관을 벗어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어찌 주도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한데 성경이 이르시는 단 하나의 길은, ‘다만’ 그래 맞다.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 ‘다만’이라는 부사는,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을 이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 내 앞에 이는 여러 근심과 걱정을 이겨낼 수는 없겠으나, 다만!

 

이는 막연한 진술이 아니라 논리적인 서술이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4).” 아무리 어떻다 해도 우리는 새보다 귀하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27).” 영광스런 왕의 의복도 들에 핀 백합화만 못하다. 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곧 ‘그도 그러한데 더욱이’ 네가 아니냐!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우연과 이치와 상황이 우리를 위해 예비 되었다. 모든 게 합력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바로 알 때 비로소 가능하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를 바로 볼 줄 아는 우리의 눈은 등불이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11:34).” 그리하여 주님은 인자하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 뭐, 그럼에도 안달복달 내 안에 이는 근심을 어쩔 수 없어, 주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께 내어놓고 오히려 그것으로 주를 더욱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주께 드릴 수 있게 하시려고, 어려움과 고난도 선으로 바꾸신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이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명령이다. 채찍이다. 주는 때리신다. 억압하신다. 강제하신다. 나의 자유의지를 운운할 때는 용납하기 싫어했던 것이 이제는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있어서, 나에게는 그러셔서, 그래 주셔서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과 접목시키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건 당연하였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6).” 영원히 사는 마음이란 주를 찬송하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마음은 나이가 들면서, 환경이 바뀌면, 세상을 떠날 때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내 주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마음이란 주를 찬송하는 것. 그럴 수 있는 마음이 결국 겸손한 마음에서 배양되는 것이었다.

 

겸손이란 주님의 산상수훈을 한 마디로 정의한 것이다. 순종이 깃드는 자리고 감사가 넘치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곧 ‘낡아지지 않는 배낭’이다. 이는 보물을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12:33).”

 

사명자의 사명감은 이를 보는 눈이었다.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 말씀을 읽으며 이와 같은 주의 음성이 들리다니. 성경을 읽는데 이와 같은 말씀이 눈에 띄다니.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감사하였다. 노랗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고 애들이 어떻게 될까봐 마음은 두근거리지만, 그래서 더욱 주를 간절히 찾고 부를 수 있는 자리였다.

 

참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다. 바로 앞도 분간하기 어렵다. 머리는 호기심으로 이해를 구하나 마음은 순종함으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 9:1-2).”

 

대체 우린 무슨 근거로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저렇게 해주실 거야.’ 하며 살았던 것인지. 되어지는 일을 보면 안 믿는 자의 결과가 더욱 선명하다. 거침이 없을 만큼 그 수고에 따른 그 이상의 결실을 낸다. 시편 73편에서는 그런 자의 것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마음의 본뜻을 알게 한다. 이를 오늘 잠언은 한 마디로 정의하였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23:17).” 언제든 우리의 낙심은 내가 그리는 그림이 아닐 때이다. 허상이 무너진 자리다.

 

기적이란 그런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구제불능, 도저히 어디다도 쓸 데가 없는 위인인데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눅 8:50).” 주가 하신다. 정말이지 내가 한 게 없는데도 애들이 글방 오는 걸 좋아한다니 그게 믿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것과 지금 이러고 있는 것과 내 마음에 주를 더욱 바라는 것도 모두 설명이 안 된다. 모든 산 것은 소망이 있다. 아직 들을 수 있는 여지와 돌아올 수 있는 기회와 주 앞에 붙들려 주를 찬송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 주를 찬송하고 죽은 이의 넉넉함이여.

 

아이가 인도에서 소식을 주었다.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이번 주말에 귀국이었다. 뭘 깨달았냐? 하고 물었더니 먹고 노느라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으나 나는 아이의 말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누가 죽은 지 12주년이 됐다며 추모 글이 여기저기 올라왔다. 그런들, 사진 속의 환한 얼굴은 산 자의 몫이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저의 오늘은 어떠할까? 생각하다 아찔하였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그러므로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4).” 살아서 아직 산 자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다. 어쩔 것인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므로 현명한 것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5-27).”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내 마음에 두시는 이 말씀으로 족한 거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8-19).” 그리하여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0-21).” 이를 내 안에 두시는 마음에 두시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 같은 혹은 누룩처럼. 

 

어떠어떠한데 어떠어떠하든지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시는 것, ‘다만’ 나는 ‘하물며 ~할 것이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 아멘.